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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호 Vol.33 - 박은정



 구안와사

 박은정






 본색을 오래 숨겼던 모양이지요. 종려나무 아래 걸인처럼 앉아 바람 소리 수집하는 악취미는 아직 버리지 못했습니다. 철길 위 달아나는 살쾡이들은 무고한 희생양처럼 목젖을 누르며 울고 있습니다. 영매를 찾기 위해 새벽길 나서는 우리는 광인처럼 중얼거렸고 노인처럼 암중모색하였지만, 무뢰한이 되어 행인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훔쳐 달아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나의 이목구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인생은 추위에 얼어붙은 길처럼 자꾸 넘어지곤 했지요. 무엇이든 욕심내고 무엇이든 뒤돌아보며 토악질을 해대던 날들.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난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곳을 찾습니다. 당신과 눈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뛰어내릴지 모르니까요. 먹갈치의 눈을 닮은 내 얼굴이 기억나곤 합니다. 불시착한 무기처럼 내동댕이쳐진 능력, 곤죽이 되도록 얼굴과 얼굴을 이어 붙이면 벌목된 숲의 향기가 납니다. 손을 내저어도 아무도 없는, 아무도 숨을 곳 없는 이곳이 나의 얼굴. 허나 즉흥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연습할 때마다 세룰리안블루의 바다 빛을 떠올립니다. 죽음 앞에서도 아름다운 것만 찾는 마음, 아름다워서 지옥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겁쟁이, 곤궁한 마음일랑 잊고 물때 낀 손톱으로 기억 속 얼굴 하나를 그립니다. 매정한 눈길 견디며 푸른 혀를 내밀고 웃던 기억 말입니다. 오랜 웅덩이에 얼굴을 씻고 아직 못다 한 밤의 부드러운 대사들을 읊조리면, 흐드러진 벚꽃 아래 달빛이 얇은 눈꺼풀을 열고 어둠을 밝힙니다. 나는 노래 없이 어지럽고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어디 이뿐이던가요. 인적 드문 골목길을 혼자 걸어갑니다. 가시면류관 같은 중절모를 쓰고 떠나는 무해한 방랑객처럼. 내 두 눈마저 멀게 만들 빛의 활주로를 찾아서. 저기, 길 끝에서 영속의 빛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믿으며. 이지러진 얼굴로 수족관 속 달빛을 들여다봅니다. 물고기는 얼굴이 없고 후유증이 없습니다. 나는 버려진 모조품처럼 잘도 뒤뚱거리며 키가 한 자만큼 휘어집니다. 










  

 박은정 시인
 2011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밤과 꿈의 뉘앙스』『아사코의 거짓말』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