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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 Vol.30 - 이장호



 깊은, 안녕

  이장호






 포도가 익어갈 때에는 벌레가 꼬이겠지
 언제 여물지 아득하던 시간이 
 문득 가까워질 즈음에
 백합을 심어 벌레를 쫓아 봐 
 송이 솎기를 안 해도 너슬너슬 잘 달릴 거야

 알이 많은 덕분일까
 달콤한 육즙을 품고
 탱글탱글 익어가고 있어
 두 달 뒤면 제상祭床에 앉아
 하얀 분을 내며 향을 피우고 있을지도 몰라

 짓무르도록 붙어 있었지
 누구 하나 떠나지 않고 말이야
 꼭지가 하나이면 우리는 다 같은 건가
 꼭지가 다르면 우리는 그저 남이 되는 걸까

 누이는 꼭지가 달랐어
 무른 것들 사이에서도 신선해 보였고
 설탕 분이 밀가루처럼 올랐지
 가장 먼저 농장을 떠나갔어
 떠나던 날 비바람이 셌는데, 누이라면
 흐트러지지 않고 도착했을 거야

 좋은 곳으로 갔겠지  
 벌레도 농약도 없는 곳 
 짓무르지 않고 비옥한 곳으로

 백합이 피고 나도 여물어 가고 있어
 나는 여기서 씨를 내릴까 해
 뜨거운 햇살을 핑계로
 툭 떨어져 깊이깊이 씨를 내릴까 해

 아득한 건 시간만이 아니었어


 







 이장호 시인
 2022년 《창작21》로 등단.
시집『노랑은 색이 아니에요』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