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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 Vol.04 - 박은정

  

수백 날의 잠

 

 박은정

 

 


하루 동안 채집한 소리들이

손안에서 웅성거린다


점점이 흩어지고 사라지려는 듯


무수한 은어들이 골목을 휘감고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자신을 확인하려고

가던 길을 머뭇거린다


어제를 정산하기 전에 내일이 오고

지겨운 기억들이 반복될지도 몰라


공백 속에서 흔들리는 새들


가장 반짝였던 시간을 떠올리려 하면

요원한 불씨 하나 바닥으로 떨어지고


횡단보도 건너 은행알이 짓이겨진 길을

비슷한 얼굴들과 스쳐 지나면서


나는 아직 집을 찾고 있다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름을 꽉 쥐고


온전한 보금자리라는 건 세상에 없어


아무리 걸어도 멀기만 한 천국 같은 거잖아


전구도 들어오지 않는 현관 앞에 서면

도착하지 못한 택배들이 가들

수신자를 찾고 있다


한 토막씩 흔적을 더듬고

피부를 열면 아직은 따듯한 풀숲


빈손으로 도착한 얼굴이

나보다 먼저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다

내가 모르는 숲과 덩굴이 자라나고

한 줌의 빛으로 물든 기도가 돋아나고


오늘 밤은 그의 옆에 죽은 듯이 누워도 좋겠다


천국은 알지 못하지만

순록과 고사리와 쓰다 만 일기장이

벼랑을 지난 풍경처럼 있어


끊어진 손금 속에도

수백 날의 잠이 쏟아질 것 같다

 

 

 

 

 

 

박은정 시인

2011년 《시인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밤과 꿈의 뉘앙스 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