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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호 Vol.18 - 김희재


 

 누에보 다리 옆 노천카페

 

 

  

간담이 서늘하도록 깊은 엘 타호 협곡 위에 세워진 도시인 론다는 투우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누에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론다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누어진다. ‘누에보 다리’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처음엔 그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다리가 스페인 론다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길이가 30m밖에 되지 않는 짧은 다리지만 완성하기까지 40여 년이나 걸렸다. 120m 높이의 협곡 위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생하고 힘들여 만든 르네상스 양식의 다리가 아름답다. 다리를 건너가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풍광이 사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문득 협곡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헤밍웨이는 이곳에 살면서 투우를 즐겼고,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구상하고 집필했다. 그는 매일 누에보 다리 아래로 산책하는 걸 좋아했단다. 다리 밑에서 올려다보는 경치는 어떤 느낌일까?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연인들이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풍경’으로도 손꼽히는 곳이다. 
다리가 빤히 바라보이는 구시가지에 예쁜 카페가 즐비하다. 비 온 끝에 유난히 더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미치도록 아름답다. 가게 문을 막 여는 오전이어서 그런지 카페 마당에 놓은 테이블에 빈자리가 많다. 
우리는 삼삼오오 파라솔 밑으로 모여들었다. 주문받으러 온 직원이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다들 카푸치노로 통일했다. 거품이 풍부하고 맛도 부드러운 유기농 커피는 기대보다 맛있다. 테이블에 놓아둔 유기농 설탕은 알갱이가 성글고 잘 녹지 않았다. 굵은 설탕을 거품 위에다 솔솔 뿌려서 와작와작 씹어먹으니 색다른 맛이 났다. 
노천카페와 딱 어울리는 커피 향에 흠뻑 취했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술술 이어진다. 여기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촬영한 아름다운 여배우 잉글리드 버그만과 미남 배우 게리 쿠퍼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헤밍웨이의 행적을 따라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까지 간다. 헤밍웨이가 말년에 살던 그 집은 미국 국립 역사기념물 ‘헤밍웨이박물관’이 되었고, 지금도 당시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내 말에 다들 귀가 솔깃하다. 쿠바가 바라보이는 미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키웨스트로 내 마음은 어느새 달음질치기 시작한다. 
카푸치노를 마시며 헤밍웨이 이야기를 하면서, 다들 숨 고르기를 했다. 어느새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쳤던 몸과 마음에 새 힘이 다시 솟았다. 

버스를 타러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커다란 투우장 앞을 지나간다. 어쩌다가 인간이 소와 겨루는 경기를 하게 되었을까?
인간과 소의 싸움은 역사가 꽤 길다. 초기에는 주로 기사들이 말을 타고 소와 싸웠다. 부하들 앞에서 자기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투우사가 땅에 서서 빨간 천으로 소를 유인해서 싸우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실, 소는 색맹이라 빨간색은 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싸움 구경하는 사람들을 더 격렬하게 흥분시키는 색깔일 뿐이다.
투우는 일반 소와는 전혀 다른, 소의 귀족으로 불리는 품종이다. 평생 일을 시키지 않았고, 스트레스받지 않게 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놔먹인다. 소 중에서 성질이 사납고 공격적인 놈을 골라 연습 한 번 시키지 않고 투우장으로 내보낸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위험해지기 때문인데, 소에게는 참 불공평한 처사다. 
소의 급소는 목 뒤에 있는 견갑골이다. 평소엔 굳게 닫혀 있다가 먹이를 먹거나 뿔로 받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 활짝 열린다. 급소가 열리면 소의 등에 말랑한 공간이 생긴다. 그럴 때 정확히 찔러야 칼이 소가죽을 뚫고 들어간다. 
칼 여러 개를 등에 꽂은 소가 지치게 되면 심판은 흰 수건을 던져 잠시 휴식 시간을 주었다. 마지막 공격은 단방에 소의 심장까지 깊이 관통하는 게 최고였다. 소가 피를 콸콸 쏟으면서 쓰러지면 관중들은 미칠 듯이 흥분하며 환호했다. 
 
나는 투우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케렌시아(Querencia)라는 스페인어 어휘가 떠오른다. 이 단어는 원래 피난처, 안식처라는 의미인데 마지막 결전을 앞둔 싸움소가 잠시 쉬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투우 경기장에는 소의 눈에만 보이는 안전 구역이 따로 있다. 예리한 칼 여러 개가 목덜미에 꽂히게 되면, 지칠 대로 지친 소는 최후의 공격을 하기 전에 자신이 정해 놓은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다시 모은다. 소의 눈에만 보이는 그 피난처가 바로 케렌시아다.
사람에게도 힘들고 지쳤을 때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케렌시아가 따로 있다. 평소엔 잊고 있던 자신의 본질과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나는 누에보 다리 옆 노천카페 같은 풍경과 분위기에서 다시 충전되는 사람인가 보다. 지금도 ‘케렌시아’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그 카페가 가장 먼저 떠오르니 말이다.




 


 
 
 김희재

  1998년 계간 수필』 등단.

  산문집 죽변 기행, 여행 에세이 끝난 게 아니다,

  브런치북 시공을 초월한 시대열정 품은 작가들 스포지모 여행기외.

  한국문협국제PEN한국본부한국수필수필문우회 회원.

  한국NGO신문 <김희재의 행복의 노래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