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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Vol.17 - 이영희


 

 세 살에게서 배우다

 

 

  

남녘에서 꽃소식이 올라오기 전인데 프리지어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프리지어가 노란 저고리라면 영산홍은 빨간 치마라는 듯 활짝 피었고 무궁화도 금방 개화할 듯 꽃망울이 통통하다. 햇볕은 고맙게 작은 실내 정원도 빠뜨리지 않고 무량으로 봄을 방사해 나누어 준다. 3·1절을 앞두고 무궁화가 활짝 피어 국경일을 경축하고,   오는 아이들을 환영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간절함이 덜했는지 어느 아침 피지도 않은 꽃망울이 뚝 떨어져 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쳐 갔다. 이사 온 지 십여 년이 넘었는데 복토도 하지 않고 가을에 피었으니, 욕심이 과했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수시로 물은 주었지만, 영양분이 모자라 꽃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도리는 하지 않고 말 못 하는 화초 바라기 한 게 미안함으로 다가왔다.
집에 온 세 살배기 손자한테 무궁화꽃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워했더니 장미를 보여주겠다며 방으로 잡아끈다. 올 때 장미꽃을 사 왔나 싶어 따라갔다.
방에는 블라인드 커튼 사이로 햇볕이 쏟아지며 장미 문양을 그리고 있는데 손자는 그것을 보고 장미가 피었다고 할머니한테 보라고 손짓한다. 문학적 상상이나 낯설게 하기란 활자를 수시로 접했으면서 방에 들어오는 햇빛이 그리는 무늬를 보고 장미라 생각한 적이 없다. 피상적으로도 자세히 본 적 없는데 세 살배기 아기는 장미가 피었다고 보라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레카 소리를 지르며 우리 집에 신동 났다고 가족들을 불렀다. 여느 할머니와 다름없는 손자 바보다.

문학을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통하여 감동의 형식으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문장을 알면서도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천착해서 빛이 그리는 무늬를 관찰하지 못하고 간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읽고 썼지만, 관찰이 부족하고 사색으로 연결하지 못했음에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고 부끄러웠다.
흔히 작가들은 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수상하면서 동기부여가 되어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때는 국민소득이 아주 낮아 취업을 우선시하는 시대였으니 국문과를 굶는 과라고 폄하하곤 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8남매가 크던 시골에서 국문과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활자 중독증 소리를 들을 만큼 책을 좋아하다 보니 조금은 더 나은 글을 쓰게 되었던지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누군가 어느 스승에게 사사했느냐고 수상식에서 물었다. 처녀가 겁 없이 아비도 모르는 자식을 낳은 것인지 하는 인식이 되었다.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싶어 매달리면서도 공직과 연결된 현시적인 공부를 우선시하여 번갯불에 콩 튀기듯 써왔다. 
세상을 살아 보니 정답도 없고 비밀도 없고 공짜도 없어 정비공이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눈을 혹사한 덕분에 망막에 부기가 없어지지 않아 정기적으로 안과에 다닌다. 의료대란 일어난 시기에 예약된 날은 연휴와 연결되어 시외버스고 고속버스고 표가 매진되었다. 지하철로 가서 천안 경유해 도착하니 한밤중이다. 읽는 시간을 할애하여 생각을 더 깊고 많이 해야 했다는 깨달음이 따라왔다.
철학자 탈레스는 하늘만 쳐다보고 걷다가 물웅덩이에 빠져 망신을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우주를 연구한 열정이 뜨겁게 전해오지만, 모든 생물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지 하늘을 딛고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갈릴레이도 지구가 돈다고 했을 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현대는 빛의 속도로 과학이 발전하여 정신과에 다니는 사람의 망상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열정과 설렘이 가득한 첫사랑도 당사자끼리의 인생 목표가 같을 때 시너지 효과가 커지는 것처럼 속도도 가끔은 방향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차를 아무리 닦고 정비해도 연식이 있어서 새로 출시되는 고도로 발전한 신차를 당할 수 없다. 새 차는 자동제어장치 등이 되어 있어서 가격이 높은 만큼 젊은이들이 많이 운전하니 사고 날 확률도 훨씬 낮다고 한다. 오래된 고령 운전자의 사고율은 반비례로 그만큼 높아진다는 보도를 보았다. 
차도 이러한데 세 살배기 아기보다 몇십 배 먼지를 뒤집어쓰고 산 인생이 어떠하겠는가. 고정관념은 나이에 비례해 또 얼마나 많은 더께가 앉았을 것인지. 먼지와 더께를 일소할 수는 없지만 세 살배기 손자의 맑은 눈으로 같은 쪽을 바라보아야겠다. 손자와 어영부영 노느라 시간 보냈다는 핑계는 사라지고 아기의 순수한 시선으로 사물을 제대로 본다면 낯선 상상력이 출현하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한 워즈워스의 시어가 더 살갑게 다가온다. 인생의 가을날 세 살에게서 배우는 깨달음에 봄이 무르익어 간다. 


 

 

 


 

 이영희

맥문학수필 신인상. 26회 동양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수필집『칡꽃 향기』정비공장편소설「비망록, 직지로 피어나다」가 있음.

 제9회 직지소설문학상, 충북수필문학상 외 다수 수상.

 한국문인협회 윤리위원, 한국소설가 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청풍문학회장 역임.

 현재 충북 수필문학회 회장, 충북소설가 협회 사무국장, 중부매일 아침뜨락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