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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 Vol.15 - 원준연


 

 님은 갔습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인파에 부대끼는 것이 싫어서 해넘이나 해돋이는 거의 찾지 않는다. 신정 때는 바닷가를 찾아서 지난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설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웅장한 산의 기개보다는 한없이 넓은 바다의 포용력을 배우고 싶어서 바다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올해는 홍성의 남당리 해변을 찾았다.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고 또 사람도 적을 것 같고.
폐부 깊숙이 들어온 상큼한 산소를 잔뜩 머금은 채 달뜬 마음으로 국도를 이용하여 귀가하는데, 낯익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만해 한용운 생가. 그렇지 않아도 보름 전쯤에 《님Nim》이라는 월간 웹진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고민하던 참이었다. ‘님’은 만해 선생을 기리는 뜻에서 붙인 것 같다. 생가를 찾으면 왠지 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전에도 생가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오랜만에 다시 찾으니 새롭다. 민족 대표 33인의 사진을 새긴 태극 모양의 조형물은 예전에 보지 못한 것이다. 생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만해 선생님의 근엄한 동상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새해 첫날 문안차 선생을 찾았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선생께 간단히 목례를 올리고, 생가의 출입문(?)을 들어선다. 문다운 문이 있는 것은 아니고, 생가지 둘레에 양쪽으로 쳐진 싸리나무 울타리 사이의 뜬 새가 문을 대신하고 있다. 
생가는 지붕이 볏짚으로 덮인 초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다. 당시의 어려웠던 시대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안방 문 위의 벽에는 전대법륜轉大法輪이라는 만해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불현듯 집의 방향이 궁금하였다. 마침 신정이라 문화재해설사도 여쭐만한 방문객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다음날 전화로 문의한즉 서향이란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여쭈었더니, 집 뒤에 누에가 잘 먹는 뽕나무가 많은 잠방산이 있어서 동향으로 지으면 해가 늦게 뜬단다. 결국 방향을 틀기 어려워 지형에 맞게 서향으로 지었는데, 마루 쪽은 길게 햇살이 들어 따뜻하단다. 방향을 틀기 어렵다는 말에 문득 만해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서울 성북구의 심우장이 떠올랐다.
수년 전 다녀왔던 심우장은 기와로 된 한옥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소박한 규모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형태인데, 우측 서재로 쓰던 방에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일창 유치웅 선생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런데 한옥의 방향이 동향이나 남향이 아니고 특이하게도 북향이다. 만해 선생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서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이 정설 같은데, 그의 따님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이 지역은 언덕 때문에 좋든 싫든 집을 북향으로 지어야 했다는 것이다. 결국 따님도 만해 선생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서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을 인정하였지만. 
서향의 생가에는 배롱나무 세 그루가 심겨 있다. 근래 심은 것이라는데, 꽃말이 부귀, 행복이다. 이제라도 천상에서 편안하게 행복을 누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는지.
북향의 한옥에는 소나무와 향나무가 몇 그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햇빛도 잘 들지 않고 습하고 추운 북향집에서 말년을 꿋꿋하게 사셨던 선생의 인내, 굳은 기상, 절개는 소나무가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또 향나무의 고귀한 향을 맡으며,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심우장에서 거대한 진리의 세계는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전대법륜의 뜻을 가다듬었을 것 같다.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서재에서 불후의 명시 ‘님의 침묵’을 떠올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카톡”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만을 소리가 들리도록 해 놓았는데, 시간대가 낯설다. 반가운 님이거나 가족이겠거니 하면서 스마트폰을 열었다. 동호회 회원인 동갑내기 여인이다. 평소에 나에게 마음을 많이 써 주었던 고마운 분이다. 가림성 사랑의 느티나무도 함께 찾고, 드라이브도 한두 번…. 오는 마음이 예쁘니 가는 마음도 예쁠 수밖에. 그런데 뭔가 심경의 변화가 온 모양이다. 타개한 낭군과 나는 같은 부대의 동료였다. 그것이 부담되었을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이 주는 정의 무게가 버거웠던 걸까. 설령 깊은 마음을 나눈대도 거칠 것이 없는 우리인데…. 그만 동호회에 이별을 고하고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아름다운 나의 님은 갔습니다.
카톡 소리의 여운만을 길게 남긴 채….

 

 

 

 

 


 

원준연

2005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감사.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추천작가회 부회장.

원종린수필문학상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