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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호 Vol.11 - 김애자


 

 저녁 한때를 소요하다

 

 

 

  

  나는 11월을 좋아한다. 11월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놓인 징검돌이다. 단풍의 축제도 11월 중순이면 완전히 막을 내린다. 무대에서 내려온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제물에 시나브로 떨어진다. 산책길은 물론 아파트 보도 불럭 위에서도 발자국을 때어 놓을 적마다 자박자박 낙엽이 밟힌다. 그야말로 일엽지추一葉知秋다. 떠날 때를 스스로 알고 돌아가는 잎들의 소연한 귀의가 아름답고도 쓸쓸하다. 현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우주의 질서라 하였다. 
  우주의 질서는 참되다. 필생필멸이 순환의 구조이질 않는가. 소멸하는 것들 있어야  태어나는 것들이 생긴다. 11월은 멸하는 것들뿐이다. 추수를 마치니 논도 밭도 텅 빈다. 텅 비어야 논두렁과 밭두렁이 보이고 산도 나무도 본래의 제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게 비우지 않으면 산의 능선과 골짜기의 구도를 정확하게 볼 기회가 없다. 정원의 나무들도 밑둥치에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나간 가지들 중에서도 가늘고 굵고, 짧고 마디진 부분까지 모여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진짜의 형태를 언제 보겠는가. 풍경만 남겨두고 명년 봄을 위해 대지도 나무들도 겨울잠에 든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끄떡도 하지 않은 응집과 의연함이 참되다.  

  그러나 지금은 9월이다. 가을과 겨울의 길목에 놓인 징검돌을 밟으려면 두 달은 족히 기다려야 할 터이다. 

  오후 여섯시면 산책을 나선다. 저녁 답이래야 인적이 끊긴다. 키보드를 타는 아이들과 엉덩이를 추켜올리고 자전거를 타고 휙휙 내달리던 사내아이들이 제집으로 돌아간 뒤래야 숲길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된다. 
 소슬한 바람결에 벚나무 잎 하나가 툭 어깨를 친다. 처서 지난 지 한 달이 넘었으니 탄소동화작업을 멈추었을 테다. 그렇다고 저 혼자 먼저 떨어지는 건 순리를 어기는 짓이다. 필경 떨켜도 만들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먼저와 나중이란 순서를 어기는 불상사는 인간사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구 중력에 속한 생물들은 모두 저마다 돌아가는 사연이 분분하다.    
 산책로에 놓인 벤치에 앉는다. 문득 꿈결인가 싶게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자작나무 가지로 앉아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궁리를 하는 모양새다. 잠시 고개를 들어 노을 진 하늘을 응시한다. 작고 반짝이는 눈빛이 천진하다. 그러나 새는 앉은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다시 포르릉 날아가 버린다. 
  작은 새가 날아간 가지에 홍시 빛 노을이 내린다. 아니 숲 전체가 노을에 안긴다. 지금 숲에 내리는 노을은 무위한 현상이다. 태양의 빛이 자전하는 지구의 모퉁이에서 어둠을 만나기 직적에 잠시 일으키는 빛의 파장일 따름이다. 이 짧은 빛의 파장 속에 내가 홀로 안겨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들을 지켜보고 있다. 
 떠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하나 같이 고요하다. 나도 방금 떨어진 벚나무 잎처럼 홀연히 낙종樂從하고 싶다. 더 이상 꾸려온 삶에 여한을 보태고 싶지 않다. 시대의 성향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기도 하면서 변수를 겪었고, 자식들 키워 제 앞 가름하도록  
길을 열어주고 나니 생은 저물고 육신은 노쇠해졌다. 이 또한 자연의 섭리임을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여 나는 저물녘에 숲길을 소요할 수 있음을 소중히 여긴다. 홀로 소요하며 박새와의 짧은 만남, 어깨를 툭 치고 땅으로 가볍게 내려앉는 벚나무 한 잎이 내 안으로 들어와 글의 씨앗을 키울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아파트 단지 저편 건물 꼭대기에 세운 십자가가 눈길을 끈다. 예수는 건물 지하에도 외딴 산속에도 계신다. 처처에서 인간들의 기도에 갇혀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으시다. 지구촌 곳곳에서 밤낮으로 별별 사연을 다 아뢰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린다. 오죽하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입을 통해 “모든 신은 죽었다”고 외쳤을까. 네 인생이니 제힘으로 살아내라고, 신에게 매달리지도 의탁하지도 말라고 일갈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존재”이라고 쐬기를 박을까. 어떠한 난관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때 삶의 성취감과 새로운 의욕이 생기는 것임을 제시했던 것이다. 스스로 삶의 중심에 서서 나답게 살아야 생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음을 니체를 통해 크게 배운바 있다. 그가 원하는 위버멘쉬까지는 못 되었어도.  
  다시 천천히 걷는다. 나답게 걷는다. 여든의 길목에서 무얼 더 바랄 것인가. 인간은 철저하게 단독자다. 어디에도 기대지도 말자. 벚나무 잎처럼 홀연히 낙종하려면 나답게 살아야 하리라.     
    
 
참고: 니체의 삶 389쪽 







김애자 

1991년 월간《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숨은 촉』『수렛골에서 띄우는 편지』『점은 생명이다』『봄, 기다리다』외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김우종문학상, 신곡문학상, 충주시민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