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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호 Vol.9 - 김경혜


 

 길 위의 배

 

 

 

  

  계기판에 ‘주유하십시오’가 뜬다. 이어, ‘전방 1.2km까지 18분간 정체가 예상됩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까지…. 주유소에 들렀다 가야 하나, 그랬다가는 밀리는 차들에 갇혀 점점 더 늦어질 텐데, 그냥 가면 집에 갈 때까지 주유소가 없는데 집까지 갈 수 있을까. 
  교사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해 어린이집이 며칠 문을 닫아 손자를 돌봐주러 가는 길. 실타래가 점점 엉키고 있는 듯하다. 입에 침이 마르고 뒷목이 뻐근해진다. 
“미안한데, 내일은 조금만 더 일찍 와주셔요. 이준이 봐주고 출근 준비하고 나가려면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아침도 못 먹고 출근할 딸이 안쓰러워 서둘러 나온 길. 사당역에 가까워지기 전부터 차가 꼼짝 못 하고 길에 서 있다. 느긋하자, 조급해 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내게 주문을 건다. 
  심호흡을 하고 차창 밖을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로 담뱃재를 털고 있는 옆 차 운전석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무엇을 하러 어디로 가는 중인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 아침은 먹었으려나. 무슨 고민이 있을까. 언짢은 마음이 들 때면 오랜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부딪히고, 맨정신엔 도무지 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고 낄낄거리다 보면 기분이 풀어져 뭐 그렇게 또 하루를 마감하며 살아가려나. 그마저 없다면 저 무심함이 어디서 나왔을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인에게 전화해 ‘뭐 사갈까’를 묻는 다정함도 있을지 몰라. 고만고만한 걱정과 이런 저런 고민, 내가 저인 듯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너와 나의 풍경….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아침부터 나이든 여자가 차를 몰고 나와서는 교통체증에 일조하고 있다고 못마땅해 할까. 복잡한 출근 시간에 움직여야 할 만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을 거라 여길까.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지난번 통화 때 자신의 얘기를 들은 어머니가 저런 표정이었을까 생각할까. 아니면, 화장도 못 하고 구겨진 티셔츠를 입었어도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분이군, 하고 생각할까. 어쩌면 오늘 처리할 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그를, 나 혼자 실컷 넘겨짚고 있다.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멈춰 섰던 길에 내 조급함을 남겨두고 앞차를 따라 달려 나간다. 그러나 이내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우면산 터널로 빠져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내비가 그쪽으로 안내하지 않은 걸 보니 그쪽도 여기처럼 차들이 밀리고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살다가 길이 안 보여 답답할 때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이쪽으로 가라고, 이 방법이 맞다고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 될 수 없으니 스스로에게 의지해 길을 찾을 수밖에. 한참을 헤매고 목적지에 도달해서야 자신이 지나온 길을 뒤 돌아보고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는지, 빤히 보이는 저 길이 왜 그때는 그렇게 안 보였는지 아쉬워하는 우리네 삶. 
  자신의 배를 몰고 우리는 각자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 풍랑을 만나 흔들리든, 목적지를 향해 순항하든 오롯이 내가 겪어내야 할 나만의 항로를 만들어간다. 나는 오늘, 나침반이 소용없는 이 잠깐 동안의 배의 항로가 당혹스럽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시간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의 길목마다 내가 만났던 혹은 만날 일들과 닮아있다. 그때마다 나는 다가올 장면을 받아들이지도, 뿌리치지도 못하고 얼마나 주춤거렸는지. 길 위에 서 있는 배를 다독거리는 일은 또 얼마나 소슬한지…. 
   ‘주유하십시오’, 내 마음의 계기판에도 계속 메시지가 뜨고 있다. 불안을 낮춰줄, 걱정을 잠재워 줄 처방전이 필요하다. 몇 년 전부터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겠노라고 주위에 떠들어 놓고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것과 낯선 곳,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붙들고 있는 걸까. 떠나겠다고 하면 남편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나 출근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것도 좀 미안하고, 워킹맘으로 육아까지 신경 쓰느라 지쳐있는 딸도 마음에 걸리고, 자신의 진로를 찾는 중인 아들도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엄청난 길치인 내가 혼자서 길을 찾아다닐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타는 일은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차표가 있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갔던 제주를 떠올렸을까. 유행처럼 번졌던 ‘제주에서 한 달 살기’의 장면들을 SNS를 통해 보았기 때문일까. 정말 좋았던 아말피나 두브로브니크의 바닷가는 혼자 가기 두려우니 만만한 제주를 점찍었을 수도…. 어쩌면 나는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정원이 잘 가꿔진 바닷가 돌담집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혼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나 대신 훌쩍 떠나줄 바다 위의 배를 보며. 그동안 주부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다고 내가 살림의 고수 같은, 희생하는 주부 9단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내 삶에 조금의 힘듦도, 불편함도 참아내지 못하는 내가 아니던가. 
  제주는 내 마음의 섬으로 잠시 밀어 놓는다. 마음속에서는 언제라도 5월의 비자림 숲으로 달려가고, 델문도의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아침 바다를 볼 수 있으리니.

  누구는, 할머니가 오면 제 엄마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버린 손자가 들어서는 자신에게 “할머니 가!!”라는 소리를 해, 눈물이 찔끔 나왔다는데…. 나를 보고 이준이가 웃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좌회전만 하면 딸네 집이다. 
  신호가 바뀐다.








 김경혜 수필가

 전 《경영과 컴퓨터》 취재기자 및 데스크 역임 

 복지상담대학원 상담심리 전공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