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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Vol.8 - 이명지


 

 황혼의 연애

 

 

 

  

  외로울 때나 마음이 적당히 촉촉하고 말랑할 때 잘 생기는 감정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영감을 준다. 향긋하면서도 쌉쌀한 커피 맛, 멜랑콜리한 이 상태가 나는 좋다. 
  나는 사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이 필요해서 연애를 한다. 그러니 대상의 첫째 조건은 영감이다. 영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과는 연애 감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니 난감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단어는 연애와 뗄 수 없는 말이다. 사랑이란 의미는 나이와 상관 없으나 그 색깔과 온도는 매우 다르다. 젊음의 연애가 뜨겁고 진한 원색이라면 황혼의 그것은 은은한 자연 색조다. 적당히 색이 바랜 가을 색이다. 못 보면 죽을 것 같고 시련에 가로 막히면 죽음도 불사하는 젊음의 연애는 호르몬과 에너지의 작용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뜨겁지 않은 건 아니다. 단풍이 꽃보다 고울 때도 있고, 노을이 아침 햇살보다 더 뜨겁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노을도 한번은 하늘을 벌겋게 물들인다고. 하지만 인연의 순리를 안다. 시절 인연이 끝나면 불타던 사랑도 식어간다는 것을 아는 성숙함이 있다.

  사랑의 온도를 지속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는 거리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거리가 필요하다.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한발 물러서서 보는 것처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 거리. 두 사람 사이에 그리움이 돋을 수 있는 물리적, 정서적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움이 없는 사랑이 사랑일까? 그리움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움을 남기지 못한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 아닐까?
  사랑한다면 감미롭게 만지고 쓰다듬고,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싶은 건 당연하다. 사랑의 기본이기도 하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도 희망 사항이다. 그 지속을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워야 더 달콤하고 온 마음이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가지 않겠는가. 사랑의 적정 거리는 두 사람만이 알 일이다. 결혼하는 딸아이에게 “사랑하거든 두 사람 사이에 바다와 같은 자유가 뛰놀게 하라.”는 칼릴 지브란의 명언을 들려주었다. 서로 자유로워야 행복할 수 있다고 당부했는데 딸은 그 말을 품었을까. 

  나의 이런 관점 때문에 나의 상대는 외로웠을까? 어쩌면 나는 상대를 외롭게 하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미적지근한 사람은 아니다. 사랑할 땐 뜨겁고, 혼자 있을 땐 그리움을 유지하고 싶은 쪽이다. 한때의 추억으로도 온 생애에 걸쳐 그리움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랑 추구형이랄까. 나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믿는 만큼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추억이 많은 사랑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도 나와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배우자가 없는 삶을 사는 내가 가끔 연애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이 반색한다. 짝이 있든 없든 똑 같다. 이 나이에 아직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려하고, 드라마에 빠져 대리 만족하며 산다는 친구들을 보면 때로 인생은 모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죄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는 사랑을 꿈꾼다. 사랑을 꿈꾸지 않고 어떻게 문학을 한단 말인가? 비단 문학뿐이랴!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이 늙지는 않는다. 아니 더 애틋해진다. 남은 시간의 절박함 앞에, 사위어 가는 살갗의 느슨함 앞에, 숨탄것들의 무기력 앞에 사랑은 더욱 뜨겁고 간절해진다. 남은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거짓으로 살아온 인생을 한탄하게 된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은 순수하다. 남녀의 나이를 합해 100이 넘어야 진짜 사랑을 안다는 말도 있다. 자신을 과장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사랑은 늘 길을 잃는다. 원하는 것이 무언지도 모른다. 가야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저 걷고 있는 인생길과 같다.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부터 혼돈의 세상에 던져져 반쪽을 갈구하는 결핍의 생을 살아간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신경쇠약증을 갖고 태어난다고 프로이트는 말했지만, 오쇼 라즈니쉬는 “인간은 가장 자연적이고 진실한 상태로 태어나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면서 신경쇠약 증세가 시작된다.”고 했다. 생각이 느낌을 통제하면서부터 우리는 이미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도 했다. 
  ‘느낌’에 충실함으로써 진정한 내가 되는 것, 그게 사랑의 본질일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아도, 단 한 사람의 사랑이 느낌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원초적 본능, 그것은 결국 둘이 하나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온전해지는 것인가 보다.    
  봄의 새싹이 한없이 경이롭고 자연의 이치가 새삼 경탄스러워지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사랑의 가치가 더욱 애틋해진다. 황혼의 사랑이 가장 소망하는 게 무얼까? 소박하지만 위대한 소망,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 살고, 어느 한쪽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줄 수 있는 것, 그 외에 무얼 더 바랄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은 충분히 사랑하지 못 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길 없는 생,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겠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날이니 평범한 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모든 오늘을 사랑으로 채워 보아야겠다.







 이명지 

 1993년《창작수필》로 등단. 

 수필집 중년으로 살아내기』『헤이, 하고 네가 나를 부를 때』『육십, 뜨거워도 괜찮아』가 있음.

 제6회 창작수필문학상, 제32회 동국문학상 수상.

 한양대학교 R-CEO과정 책임교수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