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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호 Vol.5 - 최원현


 

 그날 새벽

 

   최원현

 

 

  

 끼기기긱 덜커덩,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열세 시간 넘게 달려 온 기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 순간 사람들은 경주라도 하듯 서둘러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러나 통로는 한 명씩만을 받아들이며 사람들을 한 줄로 서게 만들었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천천히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한참 만에야 기차에서 벗어났는데도 또 긴 기차만큼이나 길게 사람들의 줄이 이어져 달리고 뛰고 걷고 했다. 하나같이 뭐가 그리도 바쁜지 크고 무거운 짐 보퉁이를 들고서도 잘도 달린다. 그리운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지겨울 만큼 길었던 기차여행에서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일까. 

 그들에 아랑곳 않고 되도록 천천히 발길을 옮기는 내 등을 치고 가는 사람, 내 몸을 부딪치며 가는 사람들을 잠시 발을 멈추고 망연히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가슴속이 유리 조각에 긁힌 것처럼 쓰라리다. 심장은 못 할 일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큰북 치듯 쿵쾅댄다. 밀려드는 불안, 저들과 다른 나라로 가는 것 같은 나, 기차에서 내려 출구를 거쳐 서울역 광장에 이르기까지의 꽤 긴 시간조차 내겐 순간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하늘을 쳐다봤다. 날이 밝기 전의 이른 새벽, 낯선 하늘 밑에서 더욱 작아져 있는 나를 오늘따라 하늘도 완전히 무시하는 것 같다. 3년 전에 처음 보았던 서울 하늘과도 달랐다. 그땐 그저 기대와 즐거움이었다. 거기다 여름이었다. 오늘은 겨울이고 하늘도 잿빛이다.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의 전환,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내 삶으로의 시작이다. 비로소 차가운 바람에 노출된 몸이 움츠러들어 있음을 느낀다. 겨울의 새벽은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내가 가야 할 곳의 주소다. 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적혀있다. 거기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갑자기 한기 같은 무서움이 왈칵 몰려왔다. 얼른 하늘을 쳐다봤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보이는 새벽하늘이 어제 집을 나섰을 때의 저녁나절 같다. 순간 저만치로 멀어져 가는 할머니의 손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멀어져 가며 희미해지는 모습, 나는 분명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내가 가는 것처럼 멀어져 가는 모습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버려진 느낌이다. 하늘도 내 머리 가까이까지 내려앉는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골의 하늘은 이렇지 않았다. 밤에는 별이 총총하고 낮에는 시리도록 파랗게 맑았다. 그런데 다들 가버린 곳에서 홀로 서 있는 내게 하늘은 지극히 무덤덤 무표정이다. 아는 체도 않는다. 열여섯 살 머스마가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살아가야 할 새 하늘 새 땅인데 말이다.   

보퉁이 보퉁이 들고 이고 메고 달리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중 나온 사람과 하나 되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는 새삼 가족이란 저런 거구나 생각을 했다. 

 광장 가 쪽으로 며칠 전 내렸던 눈을 밀어놓은 눈 더미들이 여기저기 시꺼먼 먼지를 뒤집어쓴 채 상처 딱지처럼 붙어 있다. 그게 마치 서울에서 살아갈 내 모습 같아 보여 왈칵 설움이 몰려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타야 할 번호의 버스를 기다리는 내 눈에도 아주 조금씩 날이 밝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불빛 속에 가려졌던 어두움도 옅어지는 것이 보였고 비로소 새벽이 느껴졌다. 어둠을 벗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둠보다 밝음이 더 무서워졌다. 버스만 타면 내가 맞게 될 새 풍경들이 익숙하고 낯익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떠나온 길에서 새롭게 맞아야 하는 두려운 생소함으로 나를 압박해 왔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부터 백부님 숙부님께 그날 새벽이 그렇게 나를 인계 했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삶 속에 들여 밀어질 나였기에 반가움보다 두려움과 미안함이 더 컸다. 이제는 미명을 벗고 아침이라도 빨리 왔으면 싶었다. 

완전히 날이 밝으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가.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언제쯤 올 것인가. 그렇게 나는 열여섯의 겨울을 보내던 한 새벽 서울이라는 삶터에 덩그마니 올려놓아 졌었다. 그날 나는 내가 타고 가야 할 버스를 네 번이나 보내버린 뒤에야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도 내 마음이 기다리는 아침은 쉬 오지 않았다. 참 두렵고 긴 미명의 새벽이었다. 그렇게 난 고향을 떠났고 서울이라는 또 다른 고향에 옮겨 심어졌다. 그런데 새삼 왜 그날이 갑자기 생각난 걸까.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코로나, 갇혀버린 일상에서 그날의 어떤 암담함을 오늘에서도 느낀 것일까, 그 황당하고 암담했던 57년 전 그날 새벽은 서럽고 안타까운 추억이 되었는데 왜 갑자기 TV를 보다 그날이 생각난 걸까. 춘분인 오늘 창밖의 봄 하늘은 이렇게나 맑은데. 


 

 

 

 

 

 

 

최원현

《한국수필》로 수필 등단.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월간 한국수필 발행 겸 편집인. 

 한국수필문학상, 동포문학상대상, 현대수필문학상 등 다수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고요, 그 후』등 18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