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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호 Vol.4 - 윤용철


 

 내 마음속 고라니

 

   윤용철

 

 

  

 어디에서 온 녀석일까?

 아침이면 한강에서 넘어온 새벽안개가 자욱이 깔리고 그 안갯속을 온갖 새들이 비상하는 파주 들녘, 그 들녘이 한눈에 펼쳐지는 곳에 내가 머무는 사택社宅이 있다.

 작년 여름부터이던가, 

 사택 앞 묵정밭에 거의 날마다 고라니 한 마리가 놀다 간다.

 처음에는 조그만 아기 고라니였는데 몇 달 동안에 훌쩍 자랐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 지나는 지금도 녀석은 하루도 빠짐없이 몰래 다녀가곤 한다.

 나는 행여 녀석이 놀라서 도망갈까 봐 창밖으로 가만히 내다볼 뿐이다.

 몇 년째 농사를 짓지 않아 묵정밭이 된 사택 앞은 우거진 갈대로 인해 숲이나 다름없다.

 녀석은 그 마른 갈댓잎을 뜯다가도 문득문득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기도 하고 오도카니 서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어느 틈엔가 내 마음 한 구석에도 고라니 한 마리가 들어앉았다.

 아니 내가 고라니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녀석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내 마음은 어느 사이 갈대숲을 헤매고 있다.

 늘 혼자인 모습이 나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코로나 팬데믹을 핑계로 스스로를 이곳에 유폐시킨 지 몇 해째

 어느 순간 나는 고라니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슴과에 속하는 고라니는 천적인 호랑이나 늑대가 사라진 우리나라에서 점점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녀석은 노루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송곳니가 있어 멀리서도 구분하기가 쉽다.

 그러나 때로 더 가까이 보고 싶어 거실 안에서 등산용 쌍안경으로 훔쳐보기도 하는데 보면 볼수록 녀석의 눈빛은 맑기가 그지없다.

 그 선하고 맑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금은 아득한 대학 시절 같은 과 여학생이 내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요즘 형을 보면 사슴의 눈이 떠올라. 왠지 슬퍼 보여”

 정말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 나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버님을 여읜 뒤 한동안 정신을 놓고 살았었다.

 얼마나 애처로워 보였으면 후줄근한 사내의 모습을 보고 사슴을 떠올렸을까.


 그런데 요 며칠 고라니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오늘은 지난밤 폭설로 온 들녘이 눈밭이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혹시 눈밭에서 먹을 걸 찾지 못해 쓰러진 건 아닐까?

 잠시 회사에 나갔다가 다시 사택으로 돌아와서도 늦도록 녀석을 기다린다.

 녀석이 없는 눈 덮인 겨울 들녘이 오늘따라 더 넓고 휑하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아빠 나 ㅇㅇ이랑 헤어졌어요.”

 “……”


 이렇게 작고 하찮은 짐승과의 인연에도 마음이 애잔하고 여리어지는데,

 12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온 여자와 헤어진 내 아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불현듯 온 세상이 눈에 덮여 옴짝달싹 못 한다던 CNN 뉴스 화면이 떠오른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머나먼 타지에 혼자 남겨진 내 아들이 겨울 들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내 마음속 고라니 같다.

 

 

 

 

 

 

 

 

 윤용철

 출판인. 작가. 전 교보문고 편집장. 

 현 한국출판연구소 감사, 서울교과서 대표이사.

 저서『병자호란 47일의 굴욕』『조선인물청문회』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