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초대 에세이
  • HOME > 에세이 > 초대 에세이

2024년 6월호 Vol.19 - 이영옥


 

 다홍빛 입술, 미스 신라

 

 

 

  경주 남산 금오봉 기슭에 서서 신라의 풍요를 바라본다. 기름진 평야를 둘러싼 산자락은 거센 강풍과 비구름을 막아주고, 형산강 유유히 흐르는 들판에는 논밭이 정갈하다. 서 남산에 나투었다는 미스 신라 관음보살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남산은 관음보살마애불을 비롯해 700여점의 유적과 유물을 품고 있다. 그 보물들은 산기슭과 오솔길, 냇가에서 이웃하듯 자리하고 있어 누구든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느 골짜기에서 나를 기다려줄 것 같은 마애불을 찾아 노천 박물관에 발을 들였다. 

서 남산 최고봉인 금오봉은 468m로 나지막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경사로에 흙길을 좀체 밟을 수 없는 화강암 덩어리의 산이다. 내 행보에는 어렵지만 이 화강암으로 인해 남산이 보물의 산이 된 것이라 한다. 골골마다 만나는 석불과 석탑이 이 단단한 돌에서 탄생한 것이다. 다행이 바위에 부조된 마애불을 산 초입에서 만났다. 그런데 관음보살이 홀로 서 있다. 

관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누구라도 ‘나무 관세음보살’만 염불하면 달려와 도와준다고 하여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이다. 특징으로는 머리의 보관寶冠에 작은 부처들이 있고 양손에는 버드나무와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특히 관음보살은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여래의 좌우를 보좌하는 협시보살이다. 그런데 남산의 보살은 홀로 서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보살상 앞에 섰다.   

저것을 타고 내려오셨나? 마애불은 방금 내리꽂힌 것 같은 번개 모양의 바위 앞에 서 있다. 아름답다. 통통한 뺨과 뽀얀 살결, 부드러운 미소와 스르르 흐르는 옷자락은 차마 이분을 화강암에서 모셔냈다고 생각할 수 없게 했다. 보관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는데 오랜 풍파에 흐려져 아쉽게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왼손에 가볍게 들고 있는 정병은 맑은 물이 찰랑일 것만 같이 선명하다. 또한 바위를 소복이 덮은 연꽃문양을 사뿐히 밟고 있는 맨발의 발가락도 또렷하다. 감탄하며 얼굴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비현실적이라 느낄 만큼 생생한 마애보살이다. 왜일까? 고개를 갸웃할 때 다홍색이 쏟아졌다. 앗! 다홍빛 입술이다. 
예로부터 석궁들은 부처님을 새겼다고 하지 않고 바위 속에서 모셔냈다고 한다. 신라의 어느 석궁이 저 입술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정을 대고 윤곽을 나타낸 것 같다.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다홍입술은 지금이라도 달싹일 것만 같다. 관음보살이 미스 신라로 등극한 까닭을 알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은, 산에서 만난 석불 대다수의 목이 잘려 있다. 조선의 숭유억불로 부처상까지 수난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마애불 대부분은 온전하다. 그 까닭은, 어머니들이 바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간절히 빌었던 민간신앙이 있어 바위에 새긴 불상은 훼손치 않았던 덕분이라고 한다. 정성 올리던 곳에 손을 댔다가 혹여 나쁜 기운이 들까 두려웠던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온화한 미소의 마애불에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세계 유산에 등재된 보물들이 많지만 오늘은 다홍빛 입술 미스 신라, 관세음보살만 가슴에 담고 하산 길을 잡는다.
   



 


 
 
 이영옥 

  2014년 《한국산문》 등단.

  수필집 『이 여사의 행복카페』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한국산문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