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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호 Vol.19 - 이수명

 

 

이수명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외출

 

 

 잠에서 깨면 외출은 필요 없는 것이다. 몸이 둥둥 떠다닐 필요가 없다. 외출을 하면 외출하는 편이 낫다. 잠에서 깨면 어디에 있나, 버스 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 또는 전철 안에 있으면 잠에서 깨어나기, 그리고 걷는다. 걷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걷는다. 잠에서 깨면 눈물이 얼굴에 번져 있다. 얼굴을 만지지는 않는다. 만지지 않고 얼굴을 다시 꿰맨다. 잠에서 깨면 나의 형체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가끔 잊는다. 그래서 어떤 형체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앞으로 내딛는다.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아직 썩지 않는다. 잠에서 깨면 눈앞에는 땅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다시 살아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머그컵

 


 하루종일 컵을 가지고 논다. 

 

 커피를 마신다. 책상에 앉아서 마시다가 컵을 들고 돌아다닌다.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놓고


 전화를 받고 인터폰에 응답을 하고 생각난 듯 화분에 물을 주고 베란다에 떨어져 있는 빨래를 주워 올리고 빨래집게를 집어들고 

 

 컵을 찾아다닌다.


 책상 위에 없고 식탁 위에도 화장대 위에도 


 없다.


 한 바퀴 두 바퀴


 미숙한 컵

 잠깐이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이


 두루마리 휴지가 떨어져 굴러간다.

 빨래집게를 들고 휴지를 쫓아가면

 화분에서 나온 거미가 사라진다.


 벽에 틈 하나 없는데 거미는 사라진다.


 창밖으로 구름이 가짜처럼 하얗다.


 하얀 페인트칠이 벗겨진 창틀에 

 컵이 올려져 있다.


   


  

근작시 3편ㅣ

 

 성묘객들은 밝은 옷을 입는다


 

 그는 컵에 담긴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성묘를 가자고 한다. 성묘객들은 모자를 쓰고 밝은색 옷을 입는다. 손에 꽃을 들고 있다. 무덤을 빙 둘러 서 있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절을 한다. 

 그는 컵을 휘휘 젓는다. 컵 속을 들여다보며 세상을 떠난 사람의 성묘를 가자고 한다. 공원묘지에는 성묘객들이 많아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전개된다. 미리 성묘한 사람들과 미리 성묘하려는 사람들이 벌초를 권장한다. 무덤을 정리하고 벌집을 숨긴다. 벌초를 하는 사람이 있고 벌초하고 잔디를 입히는 사람이 있고 벌초하고 잔디 입히고 다시 와서 벌초하는 사람이 있다. 올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초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컵을 계속 열심히 휘젓는다.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밝은색 옷을 입는다. 운동을 그만두고 성묘를 가자고 한다. 컵 속에는 아직도 얼음이 둥둥 떠 있다. 그는 컵을 들어 올린 채 성묘에 접속한다. 성묘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성묘객들이 무리를 이루어 나란히 걷는다. 입은 옷을 넓게 펼치며 벌떼를 스쳐 지나간다. 벌들이 전부 다른 무덤에서 기어 나온다. 성묘객들은 서로의 존재를 비밀에 부친다. 

 

 


 

 

 성탄절이 이상하다
                      

 


 캐리어 상점에 들른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캐리어들로 빼곡하다. 

 내가 찾는 기내용 캐리어가 있다.

 주인이 없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이렇게 빈 상점에 서 있으면 퇴짜를 맞은 기분이 든다. 


 가방들 사이를 돌아다닌다. 

 건강이 나빠지면 가방을 산다. 더 나은 

 깨지지 않는 캐리어를 사야 한다. 그런 것은 없지 

 흠집이 너무 쉽게 나는 것이다. 한번 생긴 흠집은 꿈쩍하지를 않는다.


 반짝거리는 가방들

 당장 반짝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을까 마음을 졸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상점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게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나도 이상하다.

 다가오는 성탄절이 이상하다. 성탄절에 여행하려고 계속 가방 가게를 찾아다니는 것이 이상하다. 

 지나가다가 아무 정보도 없는 이 상점에 들른 것이 이상하다.

 아직 건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새 가방들을 바라본다. 가방 뒤로 숨는

 두리번거리는 벌레를 맥없이 눈으로 좇는다.


 추운 겨울 시내 한복판을 걷다가 오토바이족에게 가방을 빼앗겼던 기억이 난다. 

 그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방 내놔, 악을 쓰며 쫓았었지


 내가 짐이다.

 이 짐을 계속 옮기는 자가 누군지 모른다. 

 유행하는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캐리어를 고른다.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이 캐리어를 팔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의 자연분해



                   

 비가 짧게 내렸다. 비가 그친 후 넓은 구름이 왔다. 우리는 구름을 거의 보지 않았다. 보았을 수도 있다. 구름 전선은 발달하고 발달하고 발달을 멈추고 북상 중이었다. 구름은 수시로 바뀌었다. 구름의 모양이 흐트러질까 근심하는 동안 구름이 사라졌다.


 상설 할인마트 앞에 한 노인의 조각상이 있었다. 뼈가 드러나 있는 상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조각상을 피해서 갔다. 나는 노인의 편을 들었다. 뼈가 점점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걷고 있었다. 짧은 비에 땅을 뚫고 올라온 지렁이들이 번들거렸다. 지렁이들은 비킬 줄 몰랐다. 헝클어진 지렁이들 사이를 통과하고 통과했다. 하루하루를 통과해서 하루하루의 투명한 비들이 깨어지고 우리는 걸어가면서 노인이 되었다. 구름 조각을 들고 서서 노인이 되었다. 구름을 놓쳤다. 노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뼈가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는 타지 않았다. 차량이 뜸해졌다. 무엇이 우리를 앞으로 떠밀고 있는지 우리는 오늘보다 앞서 있었다. 오늘은 자연분해되고 있었다. 발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단추를 채운 것도 같았다.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도블록이 새로 깔린 곳까지 왔다. 뭘 생각하고 있니, 네가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구름 한 점에 대해서



 

 

 

 

시인의 말ㅣ


 겨울 생각 

 

 

 며칠간 혹한의 시간이었다. 겨울의 차고 선명함에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었다. 겨울의 무위에도 마음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겨울이 한 해의 끝과 시작에 동시에 걸쳐져 있어서인지 삶은 겨울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수명 시인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붉은 담장의 커브』『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마치』『물류창고』『도시가스』, 

산문집 나는 칠성슈퍼를 보았다,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시론집 횡단』『표면의 시학, 평론집 공습의 시대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