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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Vol.18 - 박남희

 

 

박남희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이물질

 

 

 천년 묵은 거북이 등에 달라붙은 따개비는 

 거북이의 걸음을 따라 움직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거북이는 빠르게 달려가려는 시간을 붙잡고 

 느리게 기어가는데

 따개비는 거북이와 함께 남은 시간을 다 기어갈 수 있을까


 거북이는 느리게 걸어 짧은 시간을 길게 늘일 줄 안다

 거북이의 몸이 기억하는 시간을 따개비는 알까

 서로 다른 시간이 한 몸이 되어 붙어있으면 

 서로 다른 몸의 시간도 같아질까


 내 왼쪽 팔에는 물사마귀가 산다

 언뜻 보면 따개비 같은데 말랑말랑하다 

 말랑말랑한 것이 물사마귀의 언어일텐데

 물사마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커진다


 물사마귀는 어쩌면 천년거북의 등에 붙어있는

 따개비와 몰래 내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한 언어와 딱딱한 언어를 통역하는 법을

 나와 천년 거북 사이의 시간은 알고 있을 것이다


 문득 이것은 어떤 종류의 평행이론일까 생각했다

 평행이론이 우리들 일상의 어떤 이물질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거저리의 인사법

 


 아프리카 대륙 남부 서해안의

 나미브 사막은 일 년 동안 비가 내리는 날이

 열흘 정도 밖에 안 되고

 새벽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고

 한낮엔 미친 듯한 열기가 춤을 추어 

 섭씨 40도를 넘는 곳이다


 이런 급격한 온도 차로 인해

 나무는 물론 바위까지 가루가 된 이곳을 원주민들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 부른다


 그런데 엄지손톱 크기의 '거저리'라는

 딱정벌레는 이 혹독한 나미브 사막에서도

 거뜬히 살아가고 있다


 이 곤충은 해가 뜨기 전에 안개가 몰려오면

 모래 밖으로 나와서 모래언덕 경사면의 

 가장 높은 끝에 다다라 발을 펴고 머리를 

 등 쪽 안개가 몰려오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여

 등에 있는 돌기에 안개의 수증기가 맺히게 하여

 물방울이 된 수증기가 거저리의 등을 타고 흘러 내려오면

 그 물을 마신다고 한다


 나는 이런 거저리의 모습에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하는 가장 절실한 인사법을 본다

 그의 인사법은 안개를 등에 지고 하는 안개등 인사법이다

 그럴 때 안개는 그의 등을 흘러내려 물이 된다

 그 물은 거저리의 눈물이다

 그 물이 거저리를 적시고 마른 땅을 적신다

   


  

근작시 3편ㅣ

 

 종이의 세계


 

 찢어지는 기억으로 과거를 만들 수 있을까

 시간은 어쩌면 종이의 세계


 찢었다가 붙이고 낙서를 했다가 지우고

 타이레놀을 내장에 심으면

 종이꽃이 피어날까


 종이를 접었다가 펴면 흔적이 남는다

 흔적과 흔적이 만나는 곳을 모서리라고 하면

 모서리가 모여서 기억이 된다


 종이의 세계에서

 평면과 입체는 같은 것이다

 마천루를 걸으면서 야생의 들판을 상상하는 일은

 종이의 세계에서 훨씬 용이하다


 마천루의 어느 구석을 살펴보아도

 종이의 세계가 있다

 라면박스를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새우가 된 시간이 있다


 얇은 종이로 두꺼운 벽을 떠받치는 일은

 그늘이 하는 일이다

 그늘에게는 종이벽이 때때로 노마드 글램핑이다


 허리 굽은 수레에 실려 언덕을 넘어가는 종이들은

 스스로 빛을 접어서

 영원의 그늘을 만들기도 한다


 영원의 그늘은 더 이상 찢어지지 않는다

 

 


 

 

 광주와의 게임
                      

 


 광주는 숲, 광주는 최루탄, 광주는 사랑하는 내 친구, 광주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그냥 광주, 광주와 게임을 하자 광주도 모르게 광주에게 빛의 말을 선물하자


 게임은 풍선이나 구름, 게임은 싸움이나 사랑, 게임은 아무도 모르는 어떤 것, 그러나 돌아서지 말자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무의미 해 게임은 그냥 묵묵히 나를 지우는 것


 숲이 풍선을 불어서 구름을 만들거나 최루탄 연기로 싸움을 지연시키거나 맹목을 개미처럼 사랑하거나 아무 것도 손댈 수 없어서 모른다고 하거나,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이니까


 내가 그녀를 광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그녀의 눈빛이 빛나는 구슬 같았기 때문이야 그녀의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녀는 내게 숲이었고 최루탄이었고 다가올 빛의 주인이었어


 놀랍게도 어느 날 광주가 나를 부르고 있었어 나를 사랑하는 걸까 어떤 고백이 빛 뒤에 숨어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 모르게 그녀를 만났어 내가 나와 하는 게임이 이런 걸까 긴장감이 감돌았어


 광주와 게임을 하자 광주도 모르게 광주를 빛나게 게임을 하자, 광주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그냥 광주, 광주는 사랑하는 내 친구, 광주는 최루탄, 광주는 빛을 삼킨 숲, 


 아무도 함부로 지워버리거나 말할 수 없는, 내가 사랑한 기억


 

 

 

 

 

 룩북


                   

 봄은 겨울을 벗고 여름을 입고

 누에는 고치를 벗고 날개를 입는다


 그러므로 벗자


 시냇물이여, 강물에 이르면 얇은 옷을 벗고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면 속옷마저 모두 벗어버리자


 그리하여 먼 수평선을 악보로 만드는 몸의 춤을 입자

 춤은 멀어진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


 낮에는 마음 속 깊이 잔잔해지는 달의 옷을 입고

 밤에는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해의 옷을 입자


 벌써 나를 잊은 그대여

 망각을 벗자 그리고 망각을 입자

 뱀이 허물을 벗으면

 어엿한 한 벌의 망각이 홀로 빛날 수 있다


 몸은 몸을 위한 것, 그리고 옷은 옷을 위한 것

 옷을 벗으면 몸이 빛나고

 몸을 벗으면 옷이 남아서 오롯한 한 벌을 이루는 것


 그러므로 벗자, 그리고 입자

 뜨거운 여름을 벗고 선선한 가을을 입자


 나를 잊은 그대가 아주 잊혀져

 붉은 단풍이 제 몸의 흔적을 지우며 떨어져내려

 구르고 구르다가

 얇디얇은 바람의 옷을 입을 때까지


 

 

 

 

시인의 말ㅣ


 ‘어쩌다’라는 말 

 

 

 요즘 어쩌다 신생 시 전문지 《아토포스》에 붙들려 있다. 새로운 잡지를 만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왜 그 어려운 일을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 질문이 맞는데 대답할 말이 없다. 내가 시인이 된 것도 어쩌다 시인이 되었듯이 시 잡지에도 어쩌다 붙들려 있다. 잡지 이름을 ‘아토포스’라고 한 것은 ‘장소 없음’이라는 의미가 주는 자유로움과 그 말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창의성을 나타내는 시 정신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에 ‘아토포스’라는 말이 나오는「어쩌다 시간여행」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그 시에는 내가 어쩌다 《아토포스》라는 잡지에 붙들리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드러나 있다.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가 시간이다/ 너는 감자, 어쩌다 무지개/ 그러다 바람, 이럴 땐 적당히 꽃이라고 해두자// 네가 나를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러므로 네가 내게 오기까지가 시간이다// 나는 날마다 너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이름을 붙여준다// 아토포스,/ 아마도 이것은 너의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도처에 길이 너무 많다/ 아무 길이나 들어서서 너를 찾다가/ 깜박, 나를 잊는다// 시간여행을 하면 할수록/ 시간의 한가운데가 비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안에/ 생각이 없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빈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리가 나를 깨웠다/ 빈 꽃병이 꽃을 유혹하듯/ 그 빈자리가 너를 꽃피게 했다는 걸 알았다”가 전문이 이 시 제목에도 ‘어쩌다’가 들어가 있다. 어쩌다 내가 《아토포스》에게 붙들려 있듯이‘어쩌다’《아토포스》는 언젠가 나를 슬그머니 장소 없는 곳에 놓아줄 지도 모른다. 


 




 

 박남희 시인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고장난 아침』『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가 있으며, 평론집으로『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