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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호 Vol.17 - 강인한

 

 

강인한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새벽의 질문

 

 

 밤이라 해도

 눈떠 보면 한밤의 어둠

 흐릿한 흑암 속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먹지에 앉은 한 방울

 이슬이 하얀 빛을 빨아들이던 때인가.

 불사르는 소지에서

 죽은 아버지의 말을 만나던 때인가.

 

 불이 불 속에서 닳아 스러지듯이

 나는 영원히 없는 존재인가.

 영혼이란 없는 것인가.

 

 영혼의 빛깔을 사랑하는 이여,

 우리는 죽음을 만날 것이다.

 우리를 형성했던 살과 피와 정신은

 바스러질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이름 없는 것으로 물속의 잉크처럼

 풀어질 것이다.

 

 믿을 수 없다. 아아

 마른 풀뿌리가 빛을 받아 가늘어지고

 한 알의 나프탈렌에서

 나프탈렌의 영혼이 사라지는 것을.







 흰 꽃, 붉은 열매

 


 아가위나무 흰 꽃

 오월에 그대를 만났네.

 장미가 바람에 향기를 풀어 넣어줄 때였지.

 꽃 진 나무에 동그란 열매

 붉어지는 내내

 그대 까만 눈이 보고 싶었네.

 아가위나무 열매 알알이 붉어

 그 단단한 붉음 위에

 아가위나무 꽃보다 흰 눈

 눈이 내리네.

   


  

근작시 3편ㅣ

 

 삼각해변을 달리는 개

 -끌로드 를르슈, 「남과 여」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뛴다. 말 한 필이 뛴다.

 말이 뛴다. 말 두 필이 뛴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말 세 필이 뛴다.

 새도록 짖으며 달리고 또 달리는 장 루이의 차.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말이 뛴다. 네 필의 말이 뛴다.

 아이들이 소리치며 해변을 달린다. 파도처럼.

 파도가 짖으며 해변을 달린다. 개처럼.

 새벽 유리창에 흐르는 배기음.

 삼각해변을 달리는 개.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우이.

 

 


 

 

 개가 죽은 자리는 어디인가
                      

 


 사람으로 살기

 그저 순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사람 차마 못할 일

 저지르며 살지 아니하기

 독한 맘 먹지 않고 순둥순둥 살아가기.

 

 여기 어디라는데, 모질고 사나운

 개가 개에게 물려 죽은 자리,

 이 동네 어디쯤일까

 흔적도 없네.

 

 늙은 내외가 도란도란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 저만큼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건네주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

 

 오래전 사나운 개가 죽을 때

 그때는 공기 중에 먼지도 아니었을 아이들,

 앳된 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네,

 삼삼오오 무전기 들고 서성거리네.

 

 그 개가 얼마나 사나웠는지

 그 개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때 되면 배고픈 저 아이들 아무것도 모르네.

 

 짜장면을 시켜 먹었는지

 아이들이 퍼질러 앉은 일대의 공기에 섞여

 짜장면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세월은 가네.


 

 

 

 

 

 장미 열차


                   

 부드러운 슬픔을 친구의 어깨처럼 기대고

 그대는 나직나직이 울고 싶은 게지.

 퀸 엘리자베스

 장미의 이름으로 피어있는 오늘.

 

 겹겹이 여민 분홍 베일 사이로

 향기는 흐른다.

 오랜 옛날도

 바로 어제처럼 기억하며

 

 내가 타지 않은 열차를 떠나보낸다.

 잠들지 못하는 그대에게

 보내고 또 하염없이 열차를 떠나보낸다.

 

 작은 장미 정원에서

 밤마다 피고 지는 꿈

 한 닢 두 닢 헤아리는 그대에게

 오월에 떠나보내는 장미 열차.


 

 

 

 

시인의 말ㅣ


 물 먹는 자, 물 먹이는 자 

 

 

 거실 밖으로 강변북로가 달리고 한강과 저 멀리 현충원 숲, 그리고 관악산이 보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수상스키 타는 사람이 보입니다. 한강대교 부근에서 출발하여 모터보트가 끌어주는 대로 동작대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입니다. 신나게 물살을 가르며 그는 수직의 수상스키만 고집하지 않고 비록 보트의 뒤에서지만 지그재그로 물살을 가르며 곡선의 멋을 부려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매번 동작대교 부근에서 유턴을 할 때마다 스키어의 모습이 몇 분 동안 강물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오 분이 채 되지 않지만 강물 속에서 드디어 점 같은 머리가 나타나고 이내 그 아래 몸통이 딸려 나오는 수상스키가 이어집니다. 늘 아침마다 벌어지는 풍경입니다. 한강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물 먹은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없어 궁금했습니다.  

 강변북로가 눈 아래 보이는 풍경과 십 년 만에 작별하고, 삼각지로 이사왔습니다. 여기 와서 한강물 먹는 사람들 못지않게 재미있는 건 얼마 전부터 우리 집 가까운 동산 위에 철가면을 쓴 기이한 동물이 심심찮게 출몰한다는 소문입니다. 혹시 압니까, 그것이 산해경山海經에 새로이 등재될 철면피란 동물일는지.


 




 

 강인한 시인

 1967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같은 해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 당선.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푸른 심연』『입술』『강변북로』『튤립이 보내온 것들』『두 개의 인상』, 시선집 『어린 신에게』『신들의 놀이터』,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가 있음. 

전남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시와시학상 시인상,  제6회 전봉건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