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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Vol.16 - 이경림

 

 

이경림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플라스틱 에이지 1

 

 

 사람들은 이 집을 전망 좋은 집이라 한다. 9층 거실 유리 너머로 툭 트인 하늘이 보이고, 그 아래 올망졸망한 집들이 보이고, 그 사이를 달리는 길들, 틈새들을 메우며 시퍼렇게 뻗어가는 나무들, 이따금 그것들의 미세한 흔들림이 보일 때가 있다. 어떤 미친 바람이 슬쩍 흔들고 간 가지가 옆 가지에 거칠게 발 거는 것, 난데없이 당한 그 가지 엉긴 다리 풀려고 몸부림치는 것, 그 아래 검은 그림자 한 무리가 무섭게 꿈틀거리는 것이 다 보일 때가 있다

 나는 그만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민망해져 우두커니 빈 하늘이나 보다가 지금은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으로 그려보다가 가솔 이끌고 집 찾아가는 기러기 떼라도 기다려 보는 것인데 그러구러 한나절이 거웃해 질 때쯤 슬그머니 아까 그 나무들이 궁금해져 내려다보면 나무들은 그저 푸릇하고 거뭇하고 얼룩덜룩한 대로 고즈넉이 저녁으로 가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는데

​ 

 무슨 낌새도 없이 카톡은 운다 

 -우리 고양이 예삐가 죽었어요…


 나는 차마 고양이는 나비가 될 수 있다고 꽃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 깨어난 오후 

 나는 아직 나비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려고 팔을 뻗어 본다 

 뼈가 몽둥이처럼 무겁다 

 이건 대체 무엇에 쓰는 몽둥이인가 

 내가 무섭다 

 도대체 나에 가까운 무엇이 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오래 흘러야 하는가 

 플라스틱 잠 속에 주저앉아 오래 울었던 기억이 있다







 플라스틱 에이지 2

 


 팔을 뻗으면 별이 만져지던 때가 있었다 

 정체 모를 것들이 어깨를 슬쩍 치며 지나가던 때도 있었다

​ 빛이 바늘로 눈을 찌르는 아침

 밤새 달아났던 잠이 비몽사몽을 툭툭 치는 아침

​ 아직 저쪽인 너는 한 커다란 곰과 헤어질 준비도 미처 못했는데

​ 유리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어둠은 문득 

 잉걸이 되어 날아오르고

 숨죽였던 발소리들 우박처럼 지나가는데

​ 불현 클로즈업되는 것이 있다


 오래 지워졌던 사람처럼

 없는 벽 너머로 몰래 지나가는 기차처럼

 너는 얼마나 오래 유실되는 중인가


 새소리 가득한

 이 플라스틱 어항에서

   


  

근작시 3편ㅣ

 

 키스는 벚꽃처럼


 

 벚꽃 흩날리는 강둑에서였어 

 마치 벚나무의 일처럼 


 미친 듯 서로의 목을 조르며 


 너는 너 

 나는 나


 죽은 듯 깊어가는 강물의 일처럼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어 달고


 너는 누구? 

 너는 누구?


 솟구치는 꽃비 

 끓는 공중 회오리치는 길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혀들이 우글거리는

 각각의 구강을 맞대고


 묘지처럼 고요히

 우리는

 

 


 

 

 장롱들
                      

 


 장롱에 대고 백팔 배를 하고 울었다 아침을 먹었다 전화가 왔다 

 우리 맛있는 점심 먹을까? 점심은 어디인가? 점심을 먹고 나니 비로소 아침이 아니었다 점심도 아니었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귓속 어느 깊은 별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 어디 꽃잎 같은 것이 날리는 듯도 했다 

 

 장롱에 대고 천 배를 하고 웃었다 100년 묵은 오동나무 널빤지에 대고 죽은 엄마 신행저고리에 대고 경해 년 사월 초엿새 사주단자에 대고 케케 묵은 목화솜 이불에 대고 천 배를 하고 나니 칠십 년 전 지나간 저녁이 왔다 칠백 년 전인지도 모른다고 장롱들이 수군거렸다. 


 장롱에 대고 삼천 배를 하고 우두커니 있었다 다만 이름인 장롱에 대고 앞도 뒤도 없는 장롱에 대고 앞인 듯 뒤인 장롱 안인 듯 밖인 장롱 텅 빈 듯 꽉 찬 장롱 무한정적인 장롱 고성방가인 장롱 청천벽력인 장롱 캄캄절벽인 장롱 


 몸은 넓적하고 낯빛은 누렇고 키는 천정만 하고 속은 자 가웃에 여덟 개의 문이 있는 장롱문이 없는 장롱, 벙어리이고 귀머거리이고 바보 천치인 장롱에 대고 오만 배를 해도 장롱이 장롱이 되지는 않는다고 장롱이 장롱이 안되지도 않는다고 장롱들이 낄낄거렸다  


 쇠파리 한 마리가 천장의 사방 연속 무니 속을 종일 헤매고 있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유리 시계 속을 여덟 번 떨어져 내릴 때


                   

 나는 거실 모퉁이를 돌아 건넛방으로 들어가는 너와  

 화장실 문을 막 열고 나오는 너와 

 까만 손전화를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네가 

 한꺼번에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시인의 말ㅣ


 아득히 손짓하는 

 

 

 다섯 평 거실에 위리안치되어 세 해를 살았습니다 

그 속에도 나름 아침이 오고 저녁이 와서 아주 적막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다섯 평은 너무 광막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 나는 다섯 평의 이 끝에서 저 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었는데 암만 걸어도 닿지 않는 저 끝에서 누군지 아득히 손짓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경림 시인

 1989년《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 찾기』『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급! 고독』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