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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호 Vol.15 - 이영광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고치고 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아이를 낳는 것 

 같더라도

 얼굴은 말끔해

 보여야지

 사지는 멀쩡해

 보여야지

 너무 앓는 것 같진

 말아야지

 은유를 바꾸고

 리듬을 고쳐준다

 나는 돌팔이,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면

 퇴원이 될 거야

 퇴고가 될 거야

 믿을 수 없을 만큼

 믿을 수 있나?

 아픈 사람이 아픈

 아이를 낳더라도

 입성은 멀쩡해야지

 셔츠와 바지에

 하이얀 양말,

 하이얀 신발을 신기듯

 묘사는 상상으로

 상상은 묘사로,

 행간을 팽팽히

 비워줘야지

 말 못하는 사람은

 말 못하는 아이를 

 희뿌연 문맥처럼

 사랑해야지

 깨끗한 환자복을 

 빨아 입혀주고

 피를 갈아주듯

 더 세게

 더 힘없이,

 고칩니다

 낫습니다

 고칩니다

 낫습니다

 내가 앓는 그것을

 앓는 그것이 나를

 어르고 달래고

 찌르고 베고

 뒹굴고 헐떡이면,

 하느님처럼

 숨이 돌아오고

 혈색이 도나?

 마감 모르는

 마침 모르는

 문장들 문장들 문장들을 

 보면,

 병원을 둘러보면,

 젊은 날 잘못해서

 잃어버린

 어느 아이의

 희미한 얼굴이 

 떠오를 것 같고,

 영영 놓쳐버린

 희미한 옹알거림이

 어슴푸레

 희끄무레

 들려온 것 같고





 

 소풍


 


 보자기는 마른 천. 펼친다. 펼쳐서 싼다. 대추 밤 배 감 조기 막걸리. 꽁꽁 묶으면 출렁 보따리.


 보자기도 보따리도 오래되었지. 가방은 느닷없는 신상품이다. 할머니 손때, 어머니 웃음이 배어 있어요.


 가방은 보따리 고생보따리. 새 가방을 사와선 등에다 메어주며, 이봐라, 이거 보아라 하시던, 


 보자기는 보따리 고생보따리. 보자기는 옛날을 물낯처럼 다려주고. 가방들은 고생을 물려받고 조금은 하고. 


 보따리를 들고서 들과 산으로. 가방들은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마르고 구멍 난 보자기가 왔어요. 대추 밤 배 감 조기 막걸리.


 보자기는 정말, 고생한 것입니다. 소풍을 가보면 안다. 소풍을 와보면 안다. 씻은 듯이 또렷한 고생 자국이,


 반짝, 보자기엔 가을 햇살이. 가방들은 털썩털썩 엎드립니다. 보자기가 왔어요. 텅텅 빈 가방들이 왔어요.


 문패도 아니 달고 지붕도 없이. 할머니 보따리 엄마 보따리. 작년도 올해도 초록 보따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근작시 3편ㅣ

 

 허송 구름



 

 쫓기기 싫었다

 바쁘고

 간섭 받고

 만나고 떠들기 

 싫었다

 관계와 소통과 유대는 이

 싫음이,

 교란되고 실패하는

 사태였다 그럼에도 

 싫음은 쫓겼고

 바쁘고 간섭 받았고, 

 만나고 싶어 하고

 떠들고 싶어 했다

 관계와 소통과 유대를

 즐겼다

 공갈빵 같은

 사회성 한평생

 한평생 사회성

 외롭기 싫고

 힘들기 싫고

 정신 차리기

 싫어서였다

 무사안일이었고

 태연자약이었고

 희희낙락이어서였다

 빈 틈 없는

 구멍이어서였다

 끄덕거리며,

 인생 낱낱에 관대했고

 전부에 대해 단호했지만

 넌 끝났어

 실패야

 중얼거렸지만,

 그래도 나에겐

 나의 세월을 어떤

 시간으로 만들어주는

 허송세월이 

 있으리라,

 믿었다

 세월은 쉽고 

 식음 전폐 같은

 허송세월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생각되지 않았다

 되지 않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허송은,

 너무 어려워서

 살 것도

 죽을 것도 같다고

 두근거렸다

 지금 내 머리 위의

 새털구름은 막,

 시속 삼백 미터에

 도달했다

 서대문 모래내 인근을

 질주 중입니다

 느리고 긴급한

 허송세월을 두고,

 아름답고 괴로우며

 숨 막히는

 허송세월을 잊고

 너무도 바쁘고

 너무도 게을렀지만

 나의 세월은 지금, 

 시속 삼백 미터로

 뛰고 있는

 새털구름

 새털구름

 우리는 모두 고생하고 

 있습니다,

 중얼거린다

 후회 중이며

 분열 중이며

 미소 중이며

 시속 삼백 미터로

 시속 제로로 다시금

 질주 중인

 허송 구름이라고,

 사는 쉬움을 놓치고

 살지 않는 

 어려움 가까이,

 고생은 무슨

 고생입니까

 난항 중인

 출현 중인

 허송 구름이라고

 부드득,

 이를 갈며


 

 


 

 밀접 접촉자
                      

 

 

 영안실에 확진자가 발생해 격리됐다는 상주 얘기를 어렴풋이,

 들었나?

 상주는 문틈으로 친척이 넣어주는 밥과 자가 진단 키트를 받았다고.

 조문이 안 됩니다, 문자와 카톡을 사방에 보내면서

 도시락을 뜯어 먹고,

 키트로 이틀 간 한 번, 또 한 번 감염 검사를 했다는 것

 같았는데, 심야 빈소에 사람이 없다, 시신은?

 시신이 없다, 사람은?

 희부윰한 복도를 몰래 걸어가 출입문 너머 불 꺼진 안치실을

 밀접 접촉하듯 쳐다봤다는 것 같았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술병이 가득 찬 업소용 냉장고 아래

 쓰러져 있었다. 발인 날 아침이었고 입관은 끝났으며, 

 화장장엔 따라 들어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다.

 생시임이 분명한 저세상 문전에서 그는 불구경하듯, 

 하지만 밀접 접촉하듯 화장장 연기를 눈에 담다가

 따로 차를 타고,

 따로 언 산비탈엘 가 먼발치서

 따로 절하고,

 따로 고향집으로 내려와 늙은 약쟁이처럼

 다시, 진단 키트로

 코를 찌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엄마, 냉수 좀 주세요


 또, 꿈에서 깨어났다 소주병이 굴러다니는

 삼십 년 전의 건넌방이었다.

 당신을 바로 지금 밀접 접촉한 자로서,

 흐느끼는 자로서 저도

 찰나에,

 양성 반응을

 확진 판정을


 받고 싶어요

 받고 싶지 않아요

 받고 싶어요


 도대체

 어디에

 안 계신 거예요


 

 

 

 

 금일식당  


                   

 어렸을 때는 식당에 혼자 가면 미안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습니다 젊어서는, 식당에 혼자 가면 받는 홀대에 분개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요 얼마나 옳았는지 몰라요 쉰이 넘자 다시, 식당에 혼자 오면 미안해지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벌레처럼요 얼마나 옳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안한지…


 기뻐하지 않기 위해 기뻐할 것

 자랑하지 않기 위해 자랑할 것

 옳지 않기 위해 옳을 것

 옳음의 불구처럼 옳을 것 


 구가하지 않을 것 


 가난하지 않기 위해 가난할 것

 참지 않기 위해 참을 것

 미안하지 않기 위해 미안할 것

 미안의 불구처럼 미안할 것 


 구가를 구가하지 않을 것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할 것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

 죽지 않기 위해 죽을 것

 죽음의 불구처럼 죽을 것 



 

 

 

시인의 말ㅣ


 제자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시는 무언가 조금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못 해요, 못 해요, 못 해요, 주문을 걸어야 한다.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시의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 이때 같다는 것.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미천한 시의 하느님도, 내가 엎드려 길을 내어드려야 온다. 하는 것, 잘 하는 것, 하려고 하는 것, 잘 하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에 지친다. 의지라는 것의 역방향 좌석에 앉아서,

 언제나 출발이 불가능해지는 곳에서 출발할 것. 멀리 가려 하지 말 것. 제자리에서 버둥거릴 것. 제자리에서 멀리 갈 것. 제자리에서, 돌아오지 말 것.







 

이영광 시인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그늘과 사귀다』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