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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호 Vol.13 - 김일연


김일연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갈림길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에 땀 흘릴까

  

물 보고 꽃 보면서 쉽고 편하게 갈까

 

한 길로 길을 잡으면 다른 길 버려야 한다







시월

 


철새들이 딛고 가는 깊고 푸른 물동이

 

차란차란 넘치게 물너울 출렁였으나

 

새들이 떠나고 나면 잠잠히 돌아오곤 했다

 

발자국 하나 남김없이 지우는 계절이었다 

 

저 깊은 가없음을 관처럼 머리에 이고

 

모과는 고독해야만 향기를 머금는 것이다

   


  

근작시 3편ㅣ

 

내편


 

술추렴 끝났는지 조용해진 산창에


깊은 소
온 물소리
성큼, 다가앉고


맑은 달 귀를 기울여 다정히 떠오는 밤


일만 달빛 금물결 아득타 누웠으니


인생,
뭐 있다고
바글바글 들끓던


머릿속 좀들이 기어 사방에 흩어지누나

 

 


 

 

백합의 노래
                      

 


그 어떤 칼날로도 너를 열 수가 없어


연한 소금물 속에 가만히 담가두었지


세상의 이슬방울 속에 노래를 담가놓았지 


 

 

 

 

 

찔레꽃가뭄


                   

미순이 흰자위 빛 찔레꽃

 

핀다
핀다

 

맨드라미 벼슬 빛 뻐꾸기

 

운다
운다

 

소나기 한줄기 맞아라

 

사람아
가문 사람아  


 

 

 

 

시인의 말ㅣ


 어린 기린처럼

 

 

 너무 귀해서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어린 기린이 그의 심장이 과부하가 되는 것도 잊고 자꾸 목을 늘려 우듬지의 하늘로 다가가듯이
 나의 심장에는 언어의 과부하가 걸려있지만,
 녹음처럼 토해내지 못하고 아주 더디 크는 나무가 새봄에 몇 닢 뾰족한 잎을 내어 미는 시늉뿐이다.


 새 와이셔츠와 내복을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평생 낡은 옷의 솔기를 꿰매고 다려 입었던 외삼촌처럼,
 해진 슬리퍼까지도 자투리 헝겊을 덧대어 깁고 또 기워 신으셨던 어머니의 절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런 마음자리를 나는 언어로 물려받았나 보다. 

 

 「내편」은 설악의 만해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썼던 것이라 여기 소개했다. 벤치와 찻집에서 두런거리던 시인들의 말소리들도 잦아들고 물소리 높아질 무렵 보름쯤의 달빛은 또 얼마나 산창에 환하던지.
 문득 스스로를 한 마리 좀 벌레라 칭하신 ‘일두’ 선생이 생각나기도 했다. 


 바다의 마법에 홀린 것처럼
 파도가 들어오면 겅중겅중 물러나고 파도가 물러가면 살금살금 다가가며 철 지난 물가에서 서성이고 있지만 나의 또 다른 어머니, 언어가 가지신 그 무한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헛되이 육신의 어머니를 보내고 유한의 목숨을 그 어깨에 기대고 있는 내가 살기 위해서.


 




 

김일연 시인

1980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빈들의 집』 『서역 가는 길』 『달집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너와 보낸 봄날』 『깨끗한 절정 』
이영도 시조문학상, 유심 작품상, 고산문학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