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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연 시인
신작시 2편, 근작시 3편, 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갈림길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에 땀 흘릴까
물 보고 꽃 보면서 쉽고 편하게 갈까
한 길로 길을 잡으면 다른 길 버려야 한다
시월
철새들이 딛고 가는 깊고 푸른 물동이
차란차란 넘치게 물너울 출렁였으나
새들이 떠나고 나면 잠잠히 돌아오곤 했다
발자국 하나 남김없이 지우는 계절이었다
저 깊은 가없음을 관冠처럼 머리에 이고
모과는 고독해야만 향기를 머금는 것이다
ㅣ근작시 3편ㅣ
내편
술추렴 끝났는지 조용해진 산창에
깊은 소
온 물소리
성큼, 다가앉고
맑은 달 귀를 기울여 다정히 떠오는 밤
일만 달빛 금물결 아득타 누웠으니
인생,
뭐 있다고
바글바글 들끓던
머릿속 좀들이 기어 사방에 흩어지누나
그 어떤 칼날로도 너를 열 수가 없어
연한 소금물 속에 가만히 담가두었지
세상의 이슬방울 속에 노래를 담가놓았지
찔레꽃가뭄
미순이 흰자위 빛 찔레꽃
핀다
핀다
맨드라미 벼슬 빛 뻐꾸기
운다
운다
소나기 한줄기 맞아라
사람아
가문 사람아
ㅣ시인의 말ㅣ
어린 기린처럼
너무 귀해서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어린 기린이 그의 심장이 과부하가 되는 것도 잊고 자꾸 목을 늘려 우듬지의 하늘로 다가가듯이
나의 심장에는 언어의 과부하가 걸려있지만,
녹음처럼 토해내지 못하고 아주 더디 크는 나무가 새봄에 몇 닢 뾰족한 잎을 내어 미는 시늉뿐이다.
새 와이셔츠와 내복을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평생 낡은 옷의 솔기를 꿰매고 다려 입었던 외삼촌처럼,
해진 슬리퍼까지도 자투리 헝겊을 덧대어 깁고 또 기워 신으셨던 어머니의 절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런 마음자리를 나는 언어로 물려받았나 보다.
「내편」은 설악의 만해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썼던 것이라 여기 소개했다. 벤치와 찻집에서 두런거리던 시인들의 말소리들도 잦아들고 물소리 높아질 무렵 보름쯤의 달빛은 또 얼마나 산창에 환하던지.
문득 스스로를 한 마리 좀 벌레라 칭하신 ‘일두’ 선생이 생각나기도 했다.
바다의 마법에 홀린 것처럼
파도가 들어오면 겅중겅중 물러나고 파도가 물러가면 살금살금 다가가며 철 지난 물가에서 서성이고 있지만 나의 또 다른 어머니, 언어가 가지신 그 무한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헛되이 육신의 어머니를 보내고 유한의 목숨을 그 어깨에 기대고 있는 내가 살기 위해서.
김일연 시인
1980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빈들의 집』 『서역 가는 길』 『달집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너와 보낸 봄날』 『깨끗한 절정 』
이영도 시조문학상, 유심 작품상, 고산문학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