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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호 Vol.12 - 조용미


조용미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속눈썹의 무게

 

 

  달은 내게서 해마다 3.8센티미터씩 멀어져갔다 우리의 틈은 조금 더 멀어지고 있다


  무한한 슬픔이라는 말을 가진 알싸한 향이 나는 흰 꽃들이 올해는 기이하게도 이 행성의 늦은 가을에 도착했다


  하현과 그믐 사이의 달처럼 웅크리고 숨소리를 들었다 무릎을 끌어당겼다 


  속눈썹의 무게를 감당했다


  살갗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다리를 끌며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밤,


  상해가는 몸과 물거품처럼 빛나는 마음을 얻었다 


  한 생에 3.8센티미터씩 당신은 내게 성큼 가까워지고 있다 뼈와 살 사이에 끼어있는 이 얼음은 녹을 수 있을까


  알싸한 향이 나는 흰 꽃들이 해마다 조금씩 죽을 때까지 피어났다 






  삶의 지속성

 


  버드나무에 흰 꽃이 핀 것 같다

  뿌연 가루가 

  물 위에 떠다닌다


  길섶에도 

  굴러다닌다


  봄에 늦게 왔다


  먼지처럼 떠다니는

  버드나무의 

  씨앗들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일어난다


  눈송이가, 솜털이 

  휘날린다

  앞을 가린다


  일하다 죽지 않을 수 있을까


  떨어지는, 

  흩날리고 떠오르고 

  가라앉는


  끼이고 눌리고 

  깔리는


  그 시간을 비켜 갈 수 없다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봄은 만나지 못하고





근작시 3편ㅣ

 

  달리아의 붉음 


 

  달리아가 나를 자꾸 발견하는 가을입니다 


  달리아는 붉음이라는 중장비로 내게 굴진합니다 산책을 할 때마다 달리아가 나의 계측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습니다


  누군가 달리아의 붉음을 지나치는 경솔함을 자주 보아왔기에 나만은 달리아 앞에서 겸손해지고 싶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붉음 앞에 매번 무릎을 낮추었습니다


  나라는 유적의 굴진 탐사 결과 무엇이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 나, 나, 수없이 많은 내가 발굴될 테니까요 


  달리아는 나를 생포했습니다


  그 붉음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달리아는 내 심장을 스윽 찔러보고 당당하게 나를 쳐다봅니다 나는 달리아 앞에 무척 겸손해졌고 조금 어지러운 것 같습니다 


  달리아는 이제 구석구석 나를 파고들어와 나는 피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달리아의 붉음은 매혹이라 하기엔 부족합니다 달리아의 붉음에 기대어 이 가을은 목에서 피 같은 사랑이 자꾸 발설됩니다

 

 



 

 

  매화書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여러 해 먼 길 찾아와 그 아래 서 있다 돌아오곤 했던 

  한 그루 매화나무

  멀리서 보기에도 야위었다


  한 해 거른 사이 가지가 잘려나가고 

  듬성듬성 빈 곳이 많아지다니

  허연 버짐이 멍처럼 덮였다


  근처 어린 매화는 많이도 꽃을 피웠는데 

  내 아는 오래된 나무는


  대낮에도 어둑한 그늘에 든 것처럼 

  환한 기운이 사라졌다 

  꽃잎이 희끗희끗 겨우 돋아나 있다


  내후년쯤 다시 오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안아볼 수 있을까

 

  나무가 나의 병을 근심한 걸까 

  내 얼굴 어두워

  

  어떤 마음의 작용으로 

  나무와 나는 

  같은 기와색을 가지게 된 걸까


  매화와 나는 밝은 그늘이 필요하다 


  천천히 바라볼 운명이 

  필요하다


  고요한 색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왜 향기를 데리고 오는 걸까 왜 마음에 와서

  꽃받침처럼 겹쳐지는 걸까 


 

 

 

 

  내 피는 줄어들고   

                   

  하늘색 구슬처럼 반짝이는 천왕성의 흰 구름 뚜껑 사진을 보고 


  마음이 천천히 달아났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과 어디선가 피가 조금씩 새어나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같은 감각일까 


  그저 생각일 뿐일까 어느 쪽이 덜 힘들까 무엇을 확인할 때마다 피가 조금씩 말라가는 듯하다면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해왕성의 검은 대흑점처럼 현실은 모호하다


  내 피는 천왕성의 구름처럼 분명하게 줄어들고 있다


  피가 모자라 이번 생은 더 격렬하기 어려운가 피가 줄어드는 만큼 차가워질 수 있다


  마음은 더 잘게 부서질 수 있다


 

 

 

 

시인의 말ㅣ


  침묵이 시가 될 테니

 

 

  산책길 개울가에서 자색 아까시꽃을 보았다. 어떻게 저걸 처음 볼 수가 있을까? 지난해에도, 그전에도 이 자리에 있었을 텐데.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색 아까시꽃이 올해는 나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저 붉은색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내가 저 붉은색을 통해 보게 되는 세계는 또 무엇일까. 지난봄의 나는 이 봄의 내가 아닌 존재임을, 이 봄의 나는 이제 더 이상 지난봄의 내가 아닌 존재임을 알겠다.

  그런데 자색 아까시 앞을 지날 때마다 무언가 외면하고 싶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외면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는 걸까. 나도 모르는 그 사실이 어디선가 내 삶을 엎어버리기 위해 자라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 천천히 다가와다오. 그땐 외면하지 않겠다. 네가 이 봄 저 자주색 아까시꽃을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한 것을 기억해 두겠다. 저 자주색의 전언을, 저 예사롭지 않은 색의 의미를 지금은 지나치며 비에 젖은 흰 아까시꽃의 향기에 붙잡혀 나는 나무 아래에서 우산을 비스듬히 내리고 서러운 검객처럼 서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기이하고 불길한 징조들은 모두 색을 바꾸며 다가오는 것일까. 흐릿하고 아슴하고 모호해지는 마음의 틈을 찾아들어 원래의 색을 뭉그러뜨리고 흩어놓으며 서서히 채도가 변하게 되는 것일까. 


  시에는 침묵의 상태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언어를 넘어서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도 거기에 언어가 침묵하고 버티고 있으면 좋겠다. 

 앞이 캄캄할 때마다 세계의 근원적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느껴보자. 그러면 침묵하게 될 테니. 그 침묵이 시가 될 테니.


 




 

  조용미 시인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기억의 행성』『나의 다른 이름들』『당신의 아름다움』과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 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김준성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목월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