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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호 Vol.11 - 강희안

강희안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오래된 석류의 역사

 

 

   머털도사가 쌍지팡이 짚고 은하철도에 오르면 메텔을 만날 수 있다 잿빛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는 순간 화려하게 포장된 석류라는 간이역이 열린다 환하게 갈린 껍질마다 낱낱이 백인 흑심도 탱글하게 빛난다 석류 역사 999란 채널권을 쥔 빨간 알갱이들, ‘시청 한 시간 무료’라는 주차장 팻말도 꽂혀 있다 시청역에서 남남이 된 그가 어눌한 발길을 돌리자 출발을 알리는 붉은 손수건이 둥글게 펄럭이고 있다


   메텔이 청순한 눈짓으로 666이란 채널로 바꾸는 사이 희끗희끗 눈발이 비친다 자신만의 색깔과 오목샘에서 퍼낸 몸난 유모도 있으니 개념치 마시오 무심코 두드린 오타에 알알이 터진 듯 북북 그의 심장도 찢긴다 그녀에게 빠진 사내들의 완장은 빈티지였으므로, 머털도사는 새치를 뽑아 은하의 광장으로 날린다 메텔이 69란 석류의 역사에 닿으려면 난청의 기억을 닫아야 한다는 루머가 횡행할 즈음이었다






   막장 드라마

 


   막의 계급은 장이고 장의 상관은 막이다 막 시작한 연애의 막은 극이고 극의 초장은 연이다 막장은 초연이란 ost로 진부한 각색을 마쳤다 나아가 드라의 신은 Q라는 사인을 기화로 ‘드라큐라’ 영화를 제작하였다 라마교의 신도들이 대거 초청장을 받은 날이다 20211202 마란 음계의 전신은 라이고 드의 편곡은 다다 처음 개장한 실험의 시작은 다다란 사조로 막을 내렸다 더욱이 장은 폭탄을 빌미로 파국의 막을 화려한 세일로 장식했다 장의 전신은 막이었으므로 막의 대미까지 ‘빨강 구두’란 채널이 독차지했다


   마지막 싸구려 연애가 파경으로 치닫던 날, 연도와 일자가 대칭이 되므로 ‘아주 좋은 날’이라는 명가 브랜드가 출시되었다

 





근작시 3편ㅣ

 

   배꼽과 참외의 사이


 

   웃는다와 웃긴다의 사이에 배꼽참외가 있다 보조개의 위장술에 밀린 뒤늦은 참회를 아는지 모르겠다 맹인을 반려하는 보조 개의 배꼽에도 남은 참외의 흔적, 볼우물과 오목샘에 뜬 노오란 참회를 왜 보조개라 부르는지 알겠다 너를 웃기다가 터진 편지의 배꼽에 숨어 있는 슬픈 태반, 의미를 떠난 심장의 입장에서 볼 때 웃다가 베어문 게 참회배꼽이다 태반의 참외가 줄기에 집착하므로 고통의 오르가즘을 즐긴다 배꼽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돌기가 오목해지지만, 상처란 먼 기억의 거리에서 윤곽이 잡히기 때문이다

 

 



 

   메타적 관계의 등식
                      


   남자는 화려한 불길에 끓어오르고 여자는 투명한 햇살에 달아오른다 불의 색깔과 햇살의 몸이라는 관계의 등식이다 물의 몸이 남자라면 꽃의 술이 여자의 책이다 이리 감지된 독서는 모종의 충돌을 야기한다 물성과 감성은 한몸일 때 괄호를 치기 때문이다 여자는 화사한 입성에 집착하고 남자는 불안한 입지에 골몰한다


   옷가지의 색조와 조직의 면면은 일치한다 시가 여성의 정조라면 소설은 남자의 판타지다 시설의 장르 탄생과 더불어 양성애자들의 판이 깔린 것이다 남자가 구멍이라면 여자의 갈래는 뿌리다 온전히 채울수록 자라는 꽃대와 뻗을수록 안기는 흙살이 변수다 탱탱하게 부푼 꽃의 눈이 여성일 때 구멍의 몸은 남성의 책이다


   메타적 독서법이 등장한 이래 단락별로 무성애자들의 얼굴이 읽히기 시작했다

 

 

 

 

   오징어 게임   

                   

   오징어는 바깥 ㅅ에서 시작해 ㅇ이란 문으로 ㅁ을 거쳐 다시 안쪽 ㅅ으로 돌아오는 게임이다 각자의 ㅇ을 벗어날 때는 깨금발을 뛰는 전략을 취한다 공격과 수비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구경꾼을 ‘깍두기’라 하여 ㅁ 속에 남겨둔다 위험한 싸움과도 같은 놀이여서 부상자를 대비한 포석이다 갱년기 증상에 빠져 삶이 참 재미없었던 시인 k도 시살이를 접었다


   ㅅ에서 시작하여 ㅁ을 거쳐 ㅇ에 들었다 시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공격진은 저마다 깨금발로 ㅅ에서 나온 발기 조직이다 오징어 허리의 다리를 깨금발로 가로지르면 두 발을 놀린다 이들은 당당히 어둠에 맞설 ‘암행어사’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ㅁ에서 빠져나와 ㅇ 속에 자리잡던 ㅅ은 y가 되었다 박명의 어둠을 헤집던 ㄹ혜도 ㅁ 속에 들어앉았다


   종내는 ㅅ으로 다리를 쭉 뻗으며 만세를 불렀다

 

 

 

 

시인의 말ㅣ


   다양한 얼굴로 현전하는 관계의 말놀이

 

 

   나의 시는 말과 더불어 언어와 존재의 관계선을 넘나드는 즐거운 놀이 한마당이다. 말이 시의 기표라면 시의 말은 가변성을 전제로 이룩된다는 신념과 동일하다. 말이란 인간의 욕망과 세계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얼굴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보험설계사가 ‘한 번만 넣어주세요’라고 한 말이 화자의 문맥적 조율에 의해 성적으로 윤색되기도 하고, ‘간간’이 ‘짭짤하다’(sault)와 ‘종종’(sometimes)의 의미가 결합된 신조어 ‘saultimes’를 창안하기도 한다. ‘라면’의 구불거리는 습성과 ‘지휘자’의 파마머리에는 ‘상품’과 ‘예술’로 비틀린 모종의 음모가 깃들어 있다. ‘지휘자’와 ‘요리사’가 ‘젓가락’을 휘저을 때, 그 틈새를 벌리며 ‘관객’과 ‘손님’이 개입하는 형국이다.

나는 열린 기호로 요약된 ‘○인’의 미정성을 통해 ‘공인’이어도 좋고 ‘원인’이어도 좋고, ‘오인’이어도 무방한 완전한 언어를 꿈꾼다. 여러모로 차용하는 ‘떼다’란 말도 크게는 ‘버리다’와 ‘가져오다’ 사이에 있으므로 목을 잘라 떼며 잇는 창법과 통하는 격이다. 나아가 나의 언어들은 ‘바벨’(바벨탑 언어)―라벨(자본주의 상표권)―아벨(선의 상징)―바벨(권력의 제도) 등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가는 인류의 역사까지 엿보기도 한다. 언어는 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알파이자 오메가이므로, 말놀이에서 착안된 나의 언어에 대한 미늘은 성의 욕망에서 비롯된 인류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고리를 걸고 싶다. 말은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의 지시체이자 감성의 상징체이기 때문이다.


 




강희안 시인

1990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으로 등단. 시집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 『거미는 몸에 산다 나탈리 망세의 첼로 물고기 강의실 오리의 탁란(시선집), 『신발 신겨주는 여자』(연애시집), 너트의 블랙홀』, 논저 『석정 시의 시간과 공간 새로운 현대시작법 고독한 욕망의 윤리학 새로운 현대시론 등이 있음. 현재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