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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Vol.10 - 정수자


정수자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휘휘


 

 

휘어진 채 걷는다, 아픈 채 걸어왔듯

점점이 물러난 눈보라 속 등불처럼


갈수록 멀어지는 건 

집만이 아니었다

늘어져 겨우 깃든 휘휘한 저녁이면

찬우물 길어 올린 앞집 언니 머리채가


별쯤은 타고 노닐 듯 

능선을 휘달렸는데


어디서 다시 피나 금이 간 메아리는

창호에 쟁쟁 울린 달빛의 순음들은


이 시린 운율을 찾아 

쥐 오르던 책상은






화양연화처럼




풀의 율을 고르듯 버선코로 아껴 걷듯


암문에 숙어들어 그대 팔을 끼노라면


꼭 숨긴 겨드랑이들이 아련해라 주련처럼


무덤이나 하염없이 눈에 심던 옛 사람을*


따르듯 구붓해진 노송에 기대서니


그 언제 화양연화처럼 아릿해라 송화구름

 


*정조. 화성 화양루(華陽樓)에 서면 융릉(사도세자 묘) 쪽을 오래 봤다고 함. 





근작시 3편ㅣ

 

위미 동백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목도 뚝뚝 바쳐 온


붉은 단문처럼 뛰어내린 위미爲美 홑꽃들


누워서

다시 피어서


봄의 애를

끊나니


머흔 시절 먹피 같은 슬픔아 게 섰거라


꽃이 아니면 바람을 어찌 견뎠으랴


봄마다

새 눈물 지어


지피나니

혼의 혼을

 

 



 

감자떡을 살까 말까 
                      


월정사 가는 길에 감자떡을 달게 사 먹고는


언제 닫느냐니까 감자처럼 툭 던진다, 어둑해질 때유, 그럼 8시요? 그냥 묵묵 웃기에 내려올 때 사겠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언질 놓고는, 유효기간 보관방식 시시콜콜 더 묻고는, 하산 길에 다시 분분 감자떡을 살까 말까, 마트에도 많다느니 신선함이 다르다느니, 몇 푼이나 한다고 몇 분이나 걸린다고, 갑론을박 지나쳐 와 노점께로 돌아보니


별안간 훅 어두워지는 거라

 

웬 뻐꾸기도 웃는 거라

 

 

 

 

파도의 일과
         

                   

청이 딱히 없어도 맨발로 내닫는 건


바람과 손잡은 파도의 오랜 비밀


푸르른 등을 미는데 흰 속곳 춤이라니!  


더러는 하품이고 거품뿐인 일과라도


바위야 부서져라 껴안고 굴러보듯


필생의 운필을 찾아 눈썹이 세었다고


파도의 투신으로 해안선이 완성되듯


모래를 짓씹으며 달리리니 라라라


지면서 매양 칠하는 노을의 화법처럼

 

 

 

 

시인의 말ㅣ


  큰소리, 군소리, 문소리

 


 

   때론 시인의 말이 군소리 같다. 큰소리 아님 문소리일지도. 꿰매든 덧대든 메우든 주워섬기든, 없느니만 못하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암튼 맥놀이나 더늠에는 못 미치려니 주춤 멈칫 드틸 밖에. 


‘큰소리, 군소리, 문소리’ 되풀이(고전의 三弊)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시조가 현대 정형시로 거듭날 무렵 가람의 지적이다. 문소리는 ‘문덩문덩 썩은 소리’라니 진부함의 경계였다. 그런 답습이나 상투가 잦았던 까닭이다. 암만 큰소리라도 이백만 했을까만. 언젠가 이백의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에 조운의 ‘천척절애(千尺絶崖)’를 견주다, 여산과 구룡폭포 앞에서야 큰 척을 높이 깊이 다시 보긴 했다.


큰소리도 시의 한 본성일까. 때론 ‘시적 뻥’(멋대로 명명한)이 감흥을 돋우니 말이다. 뻥을 더 잘 쳐야 시적 황홀도 만지려나. 어떤 끝이며 너머의 세계를 넘나들지 못하는 자의 소심한 소회다. 모처럼 청에 지금 이곳 쓰기만도 헤매는 군소리나 늘이다니, 총총.   


 

 

 

 

정수자 시인

 

1984년 세종숭모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 

시집 『파도의 일과』『그을린 입술』『비의 후문』『탐하다』『허공 우물』『저녁의 뒷모습』『저물 녘 길을 떠나다』가 있음.  

가람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