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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호 Vol.08 - 이정록


이정록 시인

신작시 2, 근작시 3편, 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성악설

 


연통 속이 검어질수록 세상은 따뜻해진다.
속이 탄다는 말, 젖은 목장갑도 희고 둥글게 마른다.


 


 

장어


           

어머니는
눈곱만큼이라도 맘에 들면
장허다! 참 장허다! 머릴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한 마리
힘센 장어가 된 듯했다.
털끝만큼이라도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장허다! 참 장허다! 돌아앉았다.
나는 정말 먼 바다
길 잃은 어린 장어 같았다.
어른이 된 나는 언제
꿈틀꿈틀 장어가 되는가.
미끈둥한 시 한 편 쓰면
나는 장어구이 집에 간다.
부끄러워 고개 들 수 없을 때도
장허다! 소주잔에 눈물 빠트리러
꼬리치는 장어구이 집에 간다.
먼바다 끄트머리 우뚝한 섬,
어머니에게 바닷길을 여쭈러 간다.
어머니는 언제나
참 장허시다!


 



근작시 3편ㅣ

 

진달래꽃
        

                   

그럭저럭 사는 거지.
저 절벽 돌부처가
망치 소리를 다 쟁여두었다면
어찌 요리 곱게 웃을 수 있겠어.
그냥저냥 살다 보면 저렇게
머리에 진달래꽃도 피겠지.

 

 

 

 

 


그럴 때가 있다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줬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암만 가려워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첫애 업었을 때
아기 입술이 닿았던 곳이다
새근새근 새털 같은 콧김으로
내 젖은 흙을 말리던 곳이다

아기가 자라
어딘가에서 홧김을 내뿜을 때마다
등짝은 오그라드는 것이다

까치발을 딛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손차양하고 멀리 내다본다

오래도록 햇살을 업어보지만
얼음이 잡히는 북쪽 언덕이 있다
언 입술 오물거리는
약숟가락만 한 응달이 있다

 

 


시인의 말ㅣ


 수컷은 보폭이 커야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있잖여? 그게 나쁜 말이 아녀. 자꾸 찢어지다 보면 겹겹 새살이 돋을 거 아닌감. 그 새살이 고샅 거시기도 키우고 가슴팍 근육도 부풀리는 거여. 가랑이가 계속 찢어지다 보면 다리는 어찌 되겠어. 당연히 황새 다리처럼 길쭉해지겄지. 다리 길어지고 근육 차오르면 날개는 자동으로 커지는 법이여. 뱁새가 황새가 되는 거지. 구만리 창천을 나는 붕새도 본디 뱁새과여. 자네 고향이 황새울 아닌가? 그러니께 만해나 손곡 이달 선생 같은 큰 시인을 따르란 말이여. 뱁새들끼리 몰려댕기면 잘해야 때까치여. 그런데 수컷만 그렇겠어. 노래하는 것들은 다 본능적으로 조류 감별사여. 시란 게 노래 아니감? 이리 가까이 와 봐. 사타구니 새살 좀 만져보게. (졸시「뱁새 시인」전문)

 

 

 

 

 

 이정록(李楨錄)

 1989년《대전일보》신춘문예와 1993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제비꽃 여인숙』『의자』『정말』『아버지학교』『어머니학교』『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동심언어사전」, 동시집『콧구멍만 바쁘다』『저 많이 컸죠』『지구의 맛』, 청소년시집 「까짓것』『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산문집 「시인의 서랍』『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가 있음. 한성기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김달진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