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 이달의 시인
  • HOME > 이달의 시인 > 이달의 시인

2021년 9월호 Vol.03 - 신용목



   

신용목 시인

신작시 2편, 근작시 3편, 시인의 말

 


■ 신작시 2

 

 

 

우금치

 

      

 

사랑을 잃은 사람은 꼭 소를 잃은 사람처럼,

마음의 등뼈를 가을 능선으로 펼친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내일이 오는 것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거기 있다

 

밤의 전부로 가득 찬 어둠

검은 물, 계곡과 침묵

 

속에서는 안다

 

밤이라는 잉크가 없었다면 오랜 태양의 역사는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자의 먹지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의 인생에서 다른 인생으로 사랑은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서 누군가 온몸으로 불을 들고 온다 온몸으로 태우며 온다

 

계곡 그리고 소떼 그리고

 

 

불은 늘 달리고 있다 소들의 뿔처럼

 

도망치고 있다 자신의 처음으로부터

 

소의 환한 눈빛으로 비추는 누런 등뼈의 가을산, 출렁이며 불을 들고 불을 들고 서울로 달려가는 가을산,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어서, 소 고삐처럼 던져진 별빛이 서로의 슬픔을 끌고 간다

우리들의 불, 사랑과

우리들의 재, 인생의

들판으로 소떼가 지나가고 태양이 쓰러진 곳에서 풀들이 하나씩 이슬을 어금니처럼 깨물고 있을 때

 

혼자 남은 송아지 울음처럼,

 

고개는 기침 속에 기지개 속에

 

 

 

 

농공단지

      

 

차는 경사를 만들 줄 안다 바퀴는 아래로 구르니까, 비행기는 바람을 만들 줄 알고 배는 파도를 만들 줄 안다 어떤 이름은 과거를 만들 줄 안다

지옥을 만들 줄 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가로수는 나무가 된다 그 자리에서 정자가 된다

 

출근부에서 하나씩 지워지던 이름처럼 야근을 하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누웠다 간 자리

 

평상이 된다 정자나무 아래

누워

 

가을의 키를 재고 있다

가을의 키가 낙엽이 떨어진 높이에서부터라면 한쪽 끈이 끊어진 그네처럼, 낙엽은 투명한 궤적을 붙잡고 빙빙 도는 팔

 

벌집을 건드려 놓은 것 같은 저녁

 

마을을 껴안고 있다

 

저기 봐,

사람이 불타고 있어 아무도 저녁 해를 끄려 들지 않는데

불 속에서

 

불을 보는 사람

 

우리는 눈금을 가지고 있다 온몸에 마디를 가지고 있다 목과 늑골과 무릎과 팔꿈치, 모든 관절을 꺾고

가을의 깊이를 잴 수 있을 만큼 긴 눈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뚜뚜뚜, 끊어진 통화음처럼

 

아이들

성 뒤에 두 글자씩 이름을 가진 아이들

낙엽처럼 쓸려다니던

아이들, 어느 날 이름 대신 성씨로만 불리게 될

주머니에는

가제트가 그려진 딱지나 라이터 그리고

 

도루코

 

우리는 정자나무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도루코 칼을 들고

돌아가며, 한 획씩 정성껏 이름을 파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이름이

다음 해엔 쩍 벌어져 굵은 글씨로 보이고 그다음 해엔 더 벌어져

한 획마다 공처럼 부풀고

 

그다음 또 다음 해엔

희미하게 사라져

 

보이지 않던

이름의 정자나무, 아래

우리는 차례차례 누웠다

떠났습니다

 

  

  

■ 근작시 3



시계탑

      

 

고등어를 토막 내기 위해 칼을 집어들었을 때, 칼날에 베인 형광등 빛이 먼저

도마 위에 스러질 때

내일 대기질이 매우 나쁨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떠

 

침묵처럼

 

집 안을 투명하게 가득 채울 때,

 

울리지 않는 전화벨

들리지 않는 종소리 이제는 멈춰버린 바람과 기억으로부터 사라진 목소리가,

멈추기 직전의

잊히기 직전의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우리가 지나온 모든 순간 속에 감추었던 슬픔을 불러

 

세상을 움켜쥐고

 

태양이라는 노란 마개를 열고 하루를 다 짜내고 있을 때, 저녁을 온전히 견디는 자의 몫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찌그러지는

집 안에

 

비린내는 물속의 얼굴처럼 따다니고

 

밥이 끓고, 칼을 들고 한 손 가득 푸르게 누워 있는 목숨을 직전처럼 바라볼 때

 

불현듯 나는 구 도청 앞에 서 있다, 등 뒤로 바다를 끌고 온 아이가 불처럼

펄떡이는 지느러미를

금남로 검은 아스팔트로 눕혀 놓고, 그물 가득 담긴 차들을 문어로 가오리로 가물치로 풀어놓고

불현듯 나타나

서울을 묻는다, 젖은 운동화 똑똑 물을 흘리며

나는 다 잊어서 그러면 찾아야지 봄날이 어디더라 먼 역사의 개찰이 끝나기 전

귀롱나무 층층나무 국수나무 물풀레나무 하얀 꽃들의 길을 따라, 그러나

기차는 갔네 사월의 소풍처럼

그러면 불러야지 저기 무등산 능선 따라 철쭉 자리 찾아가다

큰괭이밥에 쓰러지고

노루귀

복수초 찾아가다 무너진 곳에 냉이꽃,

흰 파도의 꽃말로

 

서울을 묻는다, 찌그러진 어둠을 바다로 가득 채우며

그러면 가야지

오월 저녁은 토막 난 생선처럼 갈라진 속을 보여준다 피를 보여준다 아무리 짜내도

다 빠지지 않는 붉은 빛

 

 

 

목격자

      

 

나는 자꾸 잊는다, 어제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왔다 버려진 사람끼리 모여 있는 유리창 안에

그리고

버려질 사람끼리 모여 있는 유리창 안에

앉아 있다

어떻게 어제 일을 잊을 수 있지, 오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러 왔다 버려진 사람들을 만들려고

버려질 사람으로 앉아 있다

다시 잊고 말겠지

유리창에,

잊지 마 써놓고 바라보면 금방 지워져

공원에는

피켓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 사람이 있다 노란 리본 속에 사인펜으로 그린

눈코입이 있고

읽을 수 없는 글자의 미얀마가

있고

아이가 있다, 차가 있으면 장난감 차가 필요하고 총이 있으면 장난감 총이 필요하고

마음이 있으면 장난감 마음이 필요해서

아이는 놀고,

우리는 장난처럼 공원에서 만났는데

벌써 잊었지 죽을 사람이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인생에서는 누구나 그래서

장난감 총에 맞아 오십 년 동안 죽어가는 사람의

장난감 차를 타고 육십 년 동안 끌려가는 사람의,

일생 동안 지속되는 학살을

잠시

잊고 있는데

가을 분수가 습관처럼 하늘로 솟구쳐올라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물안개가 되고 무지개가 되고

장난이었는데

저기 봐 모두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사진 찍은 사실도, 사진도 모두 잊은 채

우리는 유리창 안에 앉아 있다

사진처럼 앉아 있다

 

 

 

목항

 

      

하늘에 새들이 박혀 있다 하늘에서

새들을 뽑으려고

바람이 긴 장도리를 들이대면, 어느 순간 뽑힌 못처럼 저녁이 떨어지는 방파제

울음 소리가

 

구부러졌다 어둠이 자석처럼 내려와

달고 가는 것들, 못과 압정과 종이 위에 빳빳하게 일어서던 쇳가루 같은 파도들

여름 태양 아래

검은 우산을 쓰고 온 가족들이 노란 리본을 묶고 갔다 항으로는 배가 들고

 

사람들은 배 위를 떠난 적 없다

 

나는 늦었다 내 몸에 박혀 있는 뼈들이 오래전 그물로 던져놓은 꿈에 걸려

밤마다 자꾸 헐거워졌다

생각했다 누구의 것일까, 내 꿈은

누구의 바다일까, 내 잠은 그러나 묻지 못했다 내가 가로챌 수 없는 슬픔의 말

내가 가져갈 수 없는 날의 기억과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둠이 물처럼 깊어서

이곳은 섬

 

시간을 물로 감고 있는 섬 물에 세월로 박혀 있는 섬

 

뒤늦게 와서

물끄러미 물을 보는 나에게 여기선 안 보인데요 손부채를 흔들던 아이가 말했다

부채를 모아 가리켰다

저쪽이 서울이래요

너무 멀어서

닿지 않는 분노가 거기 있다는 듯 햇볕 속으로 사라지던 아이가 하얗게 웃었다

부채를 펼쳐

 

손을 흔들고, 나는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반대쪽으로 떠나기 위해

반대쪽

 

바다엔 별빛이 박혀 있다

물로부터 불을 뽑아 올리는 사람들이 배를 몰고 돌아오며 하루를 저녁으로 만든다

 

 

 

■ 시론

 

이제 쓰기로 했다. 내가 모른 척했던 것들

 

 

 

 

나 자신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저 출세와 안락의 허깨비들인 미래의 병사들이 과거까지 찾아와 내 열망을 죽이고 이번 생을 점령할 때, 내 몸속에 갇힌 짐승 하나가 날카롭게 빛나는 이빨로 내 하루하루를 물어뜯는 것이다. 미래의 내가 저지르게 될 죄의 그림자가 지금 이 과거까지 드리워져 나를 흔드는 것이다. 나의 하루하루는 그 죄에 대한 형량이라고. 미래의 죄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미래를 위해 어떤 마음을 죽인 적이 있다. 나에게 도래하는 하루하루는 과거의 살해자나 다름 없을 것이므로 내 미래가 계속되는 한 나의 죄는 끝없이 생겨날 것이다. 내 마음은 그 형량을 살아내기 위해 내 몸속에 갇혔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시 내가 죽인 그 마음이 황량한 이승을 배회하다 검은 복면을 쓰고 세월호의 아이들에게, 강남역의 여성에게, 구이역의 청년에게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쓰지 못했다. 내 삶이 치욕일 때 내 글은 되도록 멀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몸속에 뒤엉킨 욕망과 부끄러움이 그들 앞에서 내 시를 밀어냈다. 하지만 쓰기로 했다. 부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끄러움이 끝나지 않아서, 그런 이유도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너무 커져서 더는 가릴 수 없을 때, 옷을 벗고 제 몸에 서툰 문신을 새기는 일처럼 말이다.

  

팽목항 가는 길에 졸음 쉼터에 들렀다. 커피를 마셨다. 뒤편으로 관상용 대나무가 가지런히 심겨져 있었다. 차들의 굉음이 채찍 자국처럼 바람에 실려 왔고, 하나씩 대나무들은 달려나가다 제 목줄의 끝에서 앞발을 치켜든 채 울부짖는 개들 같았다. 왜 개를 생각하면 처절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신용목(愼鏞穆)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나의 끝 거 창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가 있음.

   백석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노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