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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호 Vol.35 - 서요나



 그 애의 웃는 얼굴은 내 목을 휘감아오는 목련꽃 같아 *

 서요나






 끝나 버린 청춘이 수조인 줄 알고 안을 향해 소리 질러 댔는데 더 시끄러운 노래 흘러나오는 라디오인 걸 깨달았을 때였지,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앉아, 태어나 눈물을 처음 수직으로 흘려 울었던 날, 상자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열여섯 살, 책상 밑에 엎드려 우리 학교 음악실에 몰래 들어와 이십칠 분 길이의 푸가를 일 초간의 비명처럼 연주하는 옆 동네 피아노 없던 학교 애를 보고 있었네, 일 초의 비명처럼 왔다가 미처 사라질 구멍을 찾지 못해 머물게 된 뜨거운 더러움, 나의 두 발목은 터질 시간을 놓쳐 유리가 되어가는 비눗방울처럼 남아있다, 지우개와 연필과 슬리퍼가 잘린 발목들처럼 사라지지 않는 교실에서 소년은 사라짐에 무능력하려고 태어난다는 걸, 외대에 진학하지 못하는 무능만 떠올리지 말자는 걸 수만 번 넘기며 연주한 악보처럼 잘 아는 숙녀로 자라겠다고, 너는 누워서 울고 무릎을 꿇다 만 자세로 머리통 떨군 채 울고 고장 난 엔진 달고 질주하는 죽은 남자애 바이크 위에서 울고 가을 언덕 정상에서 허리를 접은 채 울고, 자고 일어나면 양궁부 언니가 허벅지 위 네 얼굴에 잔뜩 흘려놓은 눈물이 네 눈물인 줄 알고 내가 꿈에서 이만큼 울어버렸다고? 놀라 그 여자 어깨를 붙잡고 일어나 동쪽으로 달려 나갔네, 살다 보면 빨간 털 뒤덮인 들개가 되지 않아도 따뜻한 가슴을 수평으로 기울여 살지 않아도 눈물로 가슴골 차가워질 일이 이렇게나 드물 수가 있나, 축하합니다! 이제 진짜로 어른이야, 앞으로 더 안 클 거야, 무슨 말? 가슴을 적시며 우는 들개보다 드문 인류가 됐단 의미 아니겠어, 훗날 태양이 사라져도 영사기의 빛이 웅웅 너를 지옥 끝까지 찾아오리라, 이제 더 안 커도…크지 않아도…너만은 계속 자라는 모습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 도롱뇽이 물어와 변색 된 플레이어에 넣고 틀어줬으면 좋겠다, 너의 주먹이 무릎이 계속 자라 뾰족해지는 풍경 틀어줬으면 좋겠다, 영사기가 쏘는 빛의 부피 밖 끝없는 어둠 속에서도 너의 살을 찢을 듯 튀어나온 뼈 열두 덩이가 빛나, 네가 유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 시간이 틀어질 때 내 머리 위 도롱뇽과 함께 시청했으면 좋겠다, 날아드는 유탄에 맞는 장면을 다락방에 처박혀 두 번 돌려 보고 싶다, 맞아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어 돌아와 주는 너를 틀어주면 좋겠다, 나를 못 알아봐도…아니 나를 꼭 다시 알아봐 주는 장면이면 좋겠다, 내가 두 손으로 두 뺨을 쥐고 너도 들었어? 네 뼈가 깨지는 소리 들었어? 너도 들릴 만큼 컸어? 고함칠 때, 부서지는 사람 눈에서는 산 사람이 다 부서져, 네가 말해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안도하는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갈 천국은 너무 많은 영사기가 한 데 모여 돌아가고 있어 툭 치면 훅하고 흔들리는 조명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은 세트장이었으면 좋겠다, 너를 일주일 내내 매일 때린 선생을 몽키스패너 한 손에 들고 네가 결국은 찾아가지 않는 비디오가 도롱뇽의 알들 속에 묻혀 있으면 좋겠다, 너를 일주일에 한 번 때린 선생에게로 끝내 몽키스패너 두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찾아가는 비디오였으면 좋겠다, 육 일 치만큼 화가 덜 나도 육 일 치만큼 마음을 차갑게 먹는 주인공이면 좋겠다, 마음을 차갑게 식혀서 먹었으면 좋겠다, 잔인했으면 한다, 눈물로 흠뻑 젖어 차가워지는 심장이 촬영된 필름이면 좋겠다,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남녀들이 손바닥까지 퉁퉁 붓도록 울고 있으니까, 해변에서 목욕탕에서, 숲속에서, 지붕에 앉아, 사다리에 매달려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사람들 눈물이 죄다 여기로 쏟아져 흘러 네 심장을 차갑게 푹 적셔주는 장면이 저화질로 나오면 좋겠다, 이 미지근한 세계는 그만 차갑게 얼리고 여보세요 모두 이리로 오셔서 너의 귓불까지 다 차갑게 적셔줬으면 소원 없겠다, 사과처럼 차가운 심장으로 네가 선생의 어금니와 왼쪽 눈 뼈를 부러뜨리고 나면 내가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거칠게 마른 수건으로 너를 등 뒤에서 닦아주고 싶다,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닦아주고 싶다, 닦아도 닦아도 따뜻해지지 않는 너를 네 발 달린 영사기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와 눈 따가운 빛으로 오래도록 말려주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우리 둘 다 시력이 죽어 가겠지, 네 개의 눈이 두 덩이의 분노처럼 제일 먼저 나이 먹어 가겠지, 주인 향해 주인인 줄 모르고 달려드는 들개처럼 손차양을 만들지도 않고 빛을 향해 뛰어들겠지, 발광하는 빛과 빛 형상의 유리를 필사적으로 구분하면서도 손가락을 뻗어 한 번은 베여보겠다 할 테지,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흐르는 피를 조용히 나눠 빨아먹겠지, 빨아먹으며 각자 다른 데를 쳐다볼 때 나 먼저 묻겠지,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 수조인 줄 알고 두드려 댔는데 그런데…자 이제…그 라디오 속 목소리도 지금은 어른이 됐을까?…자 이제…주파수 속의 수조 속에서 혼자 숨 쉬던 그 목소리, 비로소 가슴팍 차갑게 젖은 들개가 됐을까…자 이제…네 개의 사지로 온몸을 휘어 감고 가라앉아…자 이제…일 초간의 구역질처럼 불러 내리던 삼십팔 분 길이의 자장자장 자장가가

 
*싱어송라이터 밍기뉴의 cover곡 〈그녀가 처음 울던 날〉(원곡, 김광석)의 가사를 변형.








  

 서요나 시인
 2018년《페이퍼이듬》으로 등단.
 시집물과 민율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