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날
최정란
오월은 푸르구나아* 코끼리는 늙는다 무럭무럭
오늘은 코끼리날 우리들 세상,
코끼리가 가장 할 만한 일은
늙는 일, 다시 늙는 일, 잘 늙는 일
한숨도 열망도 내려놓고 낯 뜨겁지 않게
더 잘 늙는 일
꿈이 있다면 분홍 코끼리로 다시 태어나는 일
아무 것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일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언제 지나갔을까
코끼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벗어나지 못해 안달하던
유리벽과 시멘트 정글이 나날이 좋아진다
사는 일이 갈수록 좋아진다, 염치없이
늙어보기도 전에 영원한 잠의 세계로 떠난
시퍼런 코끼리를 생각하면
이 늙음은 얼마나 미안하고 쓸쓸한 행운인지
늙는 일이 이렇게 미안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 늙어도 좋을 것을
좀 더 젊어 늙었더라면
좀 더 자주 귀를 펄럭였을 것을
좀 더 다정하게 코를 문지를 것을
거울 속 두 귀가 코끼리의 얼굴을 더듬는다
한 겹 아래 죽음을 펄럭펄럭 다독거리며
얼굴과 귀가 확인하는 쓸쓸한 배후
거죽과 거죽이 만난 뼈의 잿빛 온도
거울 속 코끼리의 영혼이 느릿느릿 붉어진다
*〈어린이날 노래〉에서.
최정란 시인
2003년《국제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독거소녀삐삐』『장미키스』『사슴목발애인』『입술거울』『여우장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