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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Vol.34 - 조영란



 나무에 등을 대고

 조영란






 나무와 겨루고 있었다
 아니다, 겨룬다는 말은 거짓말
 사실은 듣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뿌리의 침묵과
 낯선 방향으로 한없이 흩어지는 잎들의 아우성 같은 것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를 찌른 나뭇가지들이 희망일지도 몰랐다
 등 뒤에는 내가 함부로 꺾은 시간들

 꺾여서 나를 쓰게 한 것들이 있었다
 통증이 건네는 안부가 있었다

 고통은 무늬를 선사할 거야, 누군가의 심장을 본뜬 옹이와도 같은
 슬픔은 색깔을 입힐 거야, 착색된 기억으로 선명하게
 이런 말들에 솔깃해져서 

 나무에 등을 대고

 나는 이제 상처투성이 영혼을 탁본한다
 음각된 바람의 손자국을 떠내자
 눈물 마른 자리에서 복제된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의 등은 천천히 빼곡해지는 백지
 그 위로 환하게 배어나는 땀의 문양들

 통증이 무뎌질 때까지

 좀 더 오래 기대기로 한다
 좀 더 깊이 찔리기로 한다










  

 조영란 시인
 2016년《시인동네》로 등단. 
시집『나를 아끼는 가장 현명한 자세』『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오늘은 가능합니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