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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 Vol.32 - 손 음



 지금 밤의 창고에 등불을 켜는 이가 누구인가

  손 음






 창가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네 미처 떠나지 못한 새가 발이 묶였구나 싶었는데 눈물의 반짝임을 가진 초록 잎사귀라니! 지금은 밤이고 내가 저 잎사귀를 새라고 불러도 되나, 무엇이든 이상한 저녁에 정원의 꽃들은 목이 마르는지 쓸쓸한 빛을 흘리네 나는 오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낮을 기억하는 밤이 나에게 꽃이라든가 새라든가 나뭇잎이라든가 밤의 단어로 나타나 내 곁에 서가의 책으로 찻잔으로 촛대로 앉아 있네 정원에는 은목서가 서 있고 나는 그가 어떤 방문객인지 눈치채지만 은목서 향기는 정원의 검은 발목을 휘감고 벽으로 담쟁이로 지붕으로 번져가네 밤은 점차 야위어가는 사물들의 뼛속으로 침잠하고   

 어쩌나 늦은 밤 스파게티 요리를 하면서 손을 베였네요 나는 차갑고 하얀 손목으로 에이프런에 묻은 손톱만 한 핏방울을 닦고 있네요 루꼴라를 썰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손에 쥐고 있었던 칼날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은 죽음을 좋아하지 않고 허무를 좋아하지 않고 삶만 좋아해달라고 꽃을 내보내고 강아지풀과 좁은 길의 안개와 노란 달과 막차를 떠나보내는 정류장과 옥상의 빨래와 구두 가방 따위들을 보내오는데 이것은 누구의 은총인가 싶다가도 나는 그런 것들을 무한 받아보는 성실한 수혜자이면서 어떤 괴로운 상상 너머에 있는 중독자였어 

 꽃은 무엇이고 고양이는 무엇이고 저 별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격렬한 단어로 무엇을 써 내려가며 밤을 견딘다 나는 어떠한 다정한 단어로 삶을 내팽개친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이 찬란한 생의 수첩을 열어볼 테지만 웅덩이에는 밤의 수초들이 갈색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자라고 있을 것이다 










  
 
 손음 시인
 1997년부산일보신춘문예와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외, 연구서 『전봉건 시의 미의식 연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