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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호 Vol.27 - 조동범



 공동묘지

  조동범






  이곳은 아름답지도 불우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가득하지. 그것은 쓸모없는 이야기일 뿐이고, 끝도 없는 밤과 낮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신화와 전설의 오랜 고독이 되려 할 뿐이다. 지평선을 향해 침몰하는 낮의 시간은 밤의 두려움을 예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묘비마다 아름다운 새와 구름, 바람과 햇살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할 거란 상상은 언제나 실패한 예언이 된다. 우리는 얼마 전에 죽은 한 아이의 일생을 알지 못하고 오래전에 생을 마감한 어느 노인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한다. 묘비마다 깃든 이야기는 끊임없이 폐기되며 어제의 슬픔을 복기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전에 사라진 이야기. 이곳은 기억할 수 없는 역사만이 가득하고, 산 자들의 통곡마저 사라진 오늘 밤은 끝나지 않는 내일 밤이 되려고 한다. 이곳에 신화와 전설은 없다. 영웅담이나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간절함 따위도 없다. 무너진 봉분과 다리, 주인 잃은 신발이나 우산은 아무런 서사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다. 쓸모없는 아침과 저녁을 지나 두려움조차 사라진 밤이 펼쳐지면 다만 그뿐이다. 이름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어둠의 끝에서 폐기될 예정이고. 그것은 이내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될 것이다. 노을이 몰려온다 해도 장엄함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저물녘을 향해 끝도 없이 날아가는 한 무리의 새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죽음은 이토록 쓸모없고, 역사가 되지 못한 묘비명은 어떠한 회고담도 말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는 무엇을 바라보려 하나. 무너진 다리를 마지막으로 삶도 죽음도 너무나 먼 곳에 있구나. 그리하여 아름답지도 불우하지도 않은 이야기만 남아 새와 구름, 바람과 햇살의 아무것도 아닌 날이 되려 할 뿐이다.

 










 조동범 시인
 2002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보통의 식탁』,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