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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호 Vol.26 - 안희연



 각인

  안희연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 
 칼을 골라 든다 
 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
 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은 필시 칼맛이거든요
 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
 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안내 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 
 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 
 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
 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 
 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들을 열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너무 오래 의자에 앉아있어서 의자가 되어버린 적막에게 
 잠시 속내를 털어놓는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기계로 판 것만큼 정교하지 않다 

 나는 값을 치르고 미닫이문을 끼익 연다 
 등 뒤에 다섯 개의 칼, 골몰하던 뒤통수를 남겨두고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칼과 열쇠가 한통속인 이유를 
 열어야 할 문이 도처에 있는 세계에 
 나를 외롭게 남겨놓은 이유를 묻고 싶었다










 안희연 시인
 2012년창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