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 신작시
  • HOME > 신작시 > 신작시

2023년 6월호 Vol.24 - 김성백



 소크라테스 정리 

  김성백






 설거지는 체념의 자세로부터 나온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우소의 염주처럼  

 오병이어로 5천 명이 먹고 남았을 때 갈릴리의 누군가는 찌꺼기를 모아 치웠고  
 3만 왜군에 맞선 진주성의 열혈백성 누군가는 죽을 쑤고 그릇을 닦았고  
 1만 4천 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나온 배 안에서도 누군가는 냄비를 닦았으리니  
 역사는 부엌의 행간을 기록하지 않을 뿐, 먹고 떠난 자리는 누구로 인하여 아름다운가   

 수세미는 거두절미가 되고 개수통은 철두철미가 되는 원래대로의 정석  
 혼돈과 질서를 버무려 새로운 감칠맛을 낳는 카오스모제 
 열매만 보지 말고 흙을 보라고 했다   
 잔반 처리를 넘어 생명 순환의 맥락을 이해하는 일
 레몬 향 가득한 식도락을 배후에서 조율하는 일  
 물기가 마르는 곳에서 잡도리는 시작된다           

 직진 반사 굴절로 어둠을 몰아붙였던 야전의 시대는 가고 
 우뭇가사리보다 느리게 한 발 한 발 젖은 공백을 내딛는 내수용 근육들아 해전치기의 달인들아  
 쪽창 밖 구름 너머 덜 닦인 접시 하나 응응 뜨고 
 거리엔 뿔난 입들과 반성 없이 허허로운 목들, 끊어진 섬들  
 은하철도를 타고 오는 여인의 손끝엔 마미손 할인패키지 묶음뿐이라니  
 깨져버린 자기 조각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밤    
 공양간 지박령은 얼마나 아픈 체위이던가   
      
 나는 집안에서 풀어야 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말할 수 있나니
 부활하는 하루살이들아, 너희는 나와 함께 극락정토로 가자

 서풍이 붐비어 팔뚝의 김칫물을 지우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설거지는 반야정관이다  

 살림대학 기초생활학부 설거지학과 삼 년 차에 이르러 조리학 빨래학 청소학까지 멀티전공을 이수한 나는 어찌하여 철학자가 아닌가   
 레인지 후드의 찌든 기름때로 탱화를 그릴 참이면 바라밀이 지천이다 
 안거낙업을 실천하는 익명의 비구, 리필 용기에 퐁퐁을 웊웊 채운다  

 안산자락 
 대웅전이 웃고 있다     










 김성백  시인
 2018년시현실으로 등단. 
 2022년 이형기디카시신인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