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호명
나금숙
너를 위해 돈을 훔쳐봤다
너를 위해 거짓말을 해 봤다
너를 위해 죽으려고 했다
너를 위해 붉은 옷을 입어봤다
너를 위해 눈부신 흰 원피스를 입어봤다
너를 위해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다 추다 쓰러졌다
너를 아케이드 앞에서 네 시간 서서 기다렸다
너를 위해 하늘이 안 보이는 멀구슬 숲을 헤매어 봤다
너를 위해 제비집호텔을 예약했다
너를 위해 17시간 비행도 했다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서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인사도 못 하고
태평양에 빠지고 싶었다
너를 위해 백 년 후 도착하는 기차를 탔다
달리다가 넘어져 피가 흘렀다
너를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다
너를 위해 녹음기 앞에서 증언했다
너를 위해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했다
왼손잡이지만 양손으로 너를 위해
별처럼 많은 일을 더 할 수 있다
너를 위해 감금될 수도 있고
납치될 수도 있다
믹스커피만 마시고 매몰되어 한 달 살 수 있다
너를 천년 응시만 할 수 있다
너는 나
너라고 호명하면서
나를 사는 것
곧 눈썹이 희어지겠습니다
나금숙 시인
200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레일라 바래다주기』『그나무 아래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