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 신작시
  • HOME > 신작시 > 신작시

2023년 4월호 Vol.22 - 여성민



 복서의 사랑

  여성민






 사랑의 핵심은 상체만 기대는 것입니다 
 질 수가 없어요

 밀면집에서 손에 감은 핸드랩을 풀며 은퇴한 복서가 말했던 것이다 좋은 복서는 글러브에서 빛이 새어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복서는 글러브 안에  숨긴 등불을 건네려고 싸웁니다

 복싱이 그래요 빛과 물질의 관계 공기와 불과 물과 흙의 원소 중에서 불의 원소만 건네는 것이 복싱의 어려움이어서

 탄내가 나요
 물수건을 덮으세요 상체를 기대는 마음으로 불의 얼굴을 이기는 것은 물의 얼굴뿐이므로 눈보라를 덮으세요 

 사랑이 그래요 물수건 덮는 것

 그 말이 좋아져서 
 여름내 물수건 덮었지 이 시원한 공기는 어디에서 불어오나 
 팔을 벌린 나무는 권투선수처럼 쓸쓸한데 권투선수는 나무처럼 아름답나

 권투가 밝은 직업입니다
 불을 건네고 물질을 두들겨서 빛을 숨기는 직업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질 때까지 두들겨 빛을 파묻는 복서를 그려본 것이다 빛과 함께 자고 빛과 함께 이동하는 물질을 상상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로 걸으며 밝은 물질이 되는 사람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밝은 직업과 어두운 직업 중에서

 사랑은 어두운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어두운 물질이 남으니까 사랑은 빛의 도굴꾼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때

 여름 밤하늘이 습하고
 희고 두터워서
 밀면집 창으로 올려다본 하늘이 물수건 같았는데

 공기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두들겨야 좋은 면이 나온대요 면 삶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마침 밤하늘에서 빛줄기들이 쏟아져 천체가 밀면 뽑는 기계 같았고

 밀면이 밝은 물질이라고 내가 어깨로 울었던 것이다

 상체를 넣어요 물속에
 등불을 건네요 양손 훅으로

 그것이 복싱입니다 하체는 물 밖에 두는 것












 여성민 시인
 2010년세계의 문학소설 등단. 2012년서울신문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에로틱한 찰리』, 소설부드러움과 해변의 신시소설뜻밖의 의지(공저)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