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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호 Vol.22 - 이은규



 소년 한스와 달팽이 달리기 대회

  이은규






 수레바퀴 아래서
 소년 한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부러 싫증 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방금 누군가 죽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이 들어간 문장에 밑줄을 긋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성스러운 헛수고

 오늘의 소년 한스야
 무럭무럭 자라나 의연하게 자라날수록 키가 작아지다니, 골똘한 표정으로 달리기 대회 중계방송을 보고 있구나
 침대에 누운 너는 언제나 뛰고 싶어 했지
 아니 날고 싶어 했었나
  
 국제 달팽이 달리기 대회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150마리가 넘는 달팽이들이 참가한다고 해요
 가장 빠른 달팽이의 속도를 겨루는 게임 
  
 승패가 명확한 게임일수록 규칙은 간단한 법이죠
 이기거나 지거나 두 선택지만 있을 뿐

 맨 가운데 동그라미에서 맨 가장자리 동그라미까지 가장 빨리 이동하는 달팽이가 우승하는 겁니다
  
 등 껍데기에 번호표를 붙인 달팽이들이 원탁 정중앙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기 달팽이 주인 제이미 피셔가 다정하게, 단호하게 속삭이네요
 침착해
 네가 가야 할 곳에만 집중해
 다른 달팽이들은 신경 쓰지 말고

 경기가 시작되자 느릿느릿 움직이는 달팽이들을 향해 조용한 응원이 쏟아집니다

 대부분은 무사히 피니시 라인까지 도달하지만 일부는 남의 등 껍데기에 올라타거나 서로 엉겨 붙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네요

 33cm의 거리를 2분 40초에 통과한 달팽이가 나뭇잎으로 만든 올해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선수도 관중도 박수소리도 사라진 
 텅 빈 경기장에 어둠이 내립니다
  
 잔뜩 움츠린 소년 한스야, 잘 보렴
 가장 먼저 도착한 달팽이에게 우승의 영광이 돌아가
 촉수에 도는 반짝임 반짝임을

 그런데 지는 게 이기는 거야, 라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인이 없는 나는 
 침착해 집중해 신경 쓰지 마
 주문의 주문들을 외우는데
 외우면 외울수록 마음이 물렁물렁해진다

 오늘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은규 시인
 2008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다정한 호칭』『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무해한 복숭아』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