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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Vol.16 - 이성진



 떠나온 건 우리의 마음

 이성진






 누군가 나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은 사람이 녹음한 라디오 방송을 듣는 중이다
 그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일단 가라고 하루키는 말한다
 나는 어리둥절하다
 근데 어디로 갑니까
 그때 한국말 하는 하루키
 영원히 사라지는 중인 긴 잠들
 바람의 기원은 지옥이라고
 프랑스 여자가 말한다
 모두들 떨어진다는 공통점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하늘이 위로 올라간다
 비의 존재 이유
 하늘이 얼마 전부터 계속 위로 올라가는 중이지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시를 쓰는 사람의 얼굴
 도시는 이제 반도체의 밤
 청춘과 우주
 입에서 표절곡을 흥얼거렸다
 마음의 실험
 귀신도 한때 사람이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내가 점점 귀찮은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술을 마시면 베이스 기타가 잘 들린다
 아무도 청춘을 완벽하게 보낼 수 없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진 영화를 본다
 1962년 홍콩 
 이 영화는 화양연화가 아닐 수도 있다
 아무도 타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혼잣말을 한다
 모서리 끝에서 그걸 보는 남자
 자연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란성 쌍둥이
 귀신이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냥 따라오라는 뒷모습이 더 정확했다
 그런 정확함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을 갖고 싶었다
 나는 이미 죽은 채로 돌아다니는 바람이다
 전생에 내가 살던 지옥 속의 우리 집이 보인다
 눈을 흐리게 뜨고 살기로 결심했다









 이성진 시인

 201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미래의 연인』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