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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Vol.16 - 강영은



 누에

  강영은






 생각에 파묻힌 나는 잠의 노예, 털 많고 검은 잠 속에서 개미로 태어난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의자가 된다 

 잠의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는 의자의 노예, 잠이라는 서러운 벼랑을 지닌다 잠의 벼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등을 곧추세운 붓이 된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수치도 염치도 잠을 재우는 나는 붓의 노예, 눈은 오그라들고 꿈은 푸르러 잠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린다 

 단단한 잠에 묶여 급속히 늙어가는 나는 초록抄錄의 노예, 마디마디 주름진 길을 기록하지 못하면 뽕나무 이파리에 누더기를 매단다 

 뽕나무 이파리에 목숨 거는 나는 누더기의 노예, 한 벌 두 벌 세 벌 네 벌 누더기를 벗을 때마다 죽음이 태어난다 죽음을 벗지 못하면 무덤이 된다 

 무덤 위에 똥을 누는 나는 비명碑銘의 노예, 한 올 한 올 죽음을 꿰맬 때마다 몸에서 뽑아낸 허공 길을 펼친다  

 바리데기가 온다 바리데기가 온다 비단옷을 걸치고 뽕나무 밭으로 들어선다 뽕나무 이파리에 날개가 솟구친다

 “5무의 집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세 먹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고 얼싸 좋다 춤추는 바리데기 
 
 잠의 문턱을 여는 나는 노래의 노예, 우주의 비단길을 꿈꾼다


 *맹자








 강영은 시인

 2000년미네르바등단.  시집『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상냥한시론(詩論)』 외2권, 시선집『눈잣나무에 부치는 詩』 PP(poem, phot, esaay)집『산수국 통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