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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호 Vol.15 - 이지호



 흑백 사진 속에 오래된 봄이 숨어 있어요

 이지호






 아이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때
 내가 세상 안으로 가까이 가고 있을 때 

 병실밖에 갇힌 바람이 조용한 계절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 약봉지의 이름은
 오래 전 망한 이름 같았어요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리지 못한
 태명을 붙잡고
 소리 내 울기에는 주어진 애도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치료는 처방의 문제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알고 있는 처방, 그런 처방전은 흔해서 구겨버렸어요

 숨고 숨고 숨다가 
 끝까지 끝까지 벼랑에 몰려서 
 비명이 창밖 나무를 붉게 물들였어요 

 아이에 대한 예의로 받아 놓은
 약봉지를 멀리하는 나의 행동은 대답이 되지 않았어요  

 저쪽 경계 넘어 잎들이 다 지고 있어요

 그리고 매년 봄이 오고
 색색의 꽃이 피었어요 

 약이 듣지 않는 나이가 있어요










 이지호 시인

 201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