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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호 Vol.14 - 김민율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의 독자

 김민율






 마을 노인들이 볕 좋은 마당에 나와 앉아 있다
 팔랑이는 배추흰나비의 몸짓을 
 백 년 동안의 꿈을 
 지팡이로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고 있다

 너희들은 봄 되면 다시 돌아오는데
 죽은 사람은 왜 돌아올 수 없나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워하다 
 벚꽃에게 말 건네며 벚꽃을 번역해 읽던 
 엄마는 이제 세계문학을 펼쳐 읽고 있다

 이른 봄 텃밭에 거름을 뿌려 놓고,
 카프카의 변신을 공책에 베껴 쓰면서 
 세계정신을 갈아엎는다
 위 문장과 아래 문장 사이에 고랑을 낸다

 어떤 아름다운 씨눈을 틔우려는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 씨에 관한 상상의 씨를 뿌린다

 나는 마당을 기웃거리다 씨감자 싹을 읽고 있다
 껍질 밖으로 첫 울음소리가 기어 나올 때 
 발아하는 자리마다 연둣빛 말문이 터지고 있다
 어떤 아름다운 서사가 시작되고 있다

 싹눈이 고독한 출생과 죽음을 읽는 첫 독자다











 김민율 시인

 2015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