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의 독자
김민율
마을 노인들이 볕 좋은 마당에 나와 앉아 있다
팔랑이는 배추흰나비의 몸짓을
백 년 동안의 꿈을
지팡이로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고 있다
너희들은 봄 되면 다시 돌아오는데
죽은 사람은 왜 돌아올 수 없나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워하다
벚꽃에게 말 건네며 벚꽃을 번역해 읽던
엄마는 이제 세계문학을 펼쳐 읽고 있다
이른 봄 텃밭에 거름을 뿌려 놓고,
카프카의 변신을 공책에 베껴 쓰면서
세계정신을 갈아엎는다
위 문장과 아래 문장 사이에 고랑을 낸다
어떤 아름다운 씨눈을 틔우려는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 씨에 관한 상상의 씨를 뿌린다
나는 마당을 기웃거리다 씨감자 싹을 읽고 있다
껍질 밖으로 첫 울음소리가 기어 나올 때
발아하는 자리마다 연둣빛 말문이 터지고 있다
어떤 아름다운 서사가 시작되고 있다
싹눈이 고독한 출생과 죽음을 읽는 첫 독자다
김민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