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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호 Vol.14 - 정선


 바람의 파종

 정 선 






 바람이 통뼈 속을 다녀갔다

 석회암 동굴은 물을 먹고 산다
 물이 흐르지 않는 동굴은 죽은 것
 바람은 말들을 먹고 살아간다
 바람이 내 뼛속을 통과할 때마다 한 뼘씩 노을 쪽으로 기울어졌다

 날것의 말을 살짝 흘렸다
 흘린 말은 절뚝거리면서 잘도 떠돌았고
 말의 돌기들은 아무 마음에나 잘 붙었다
 흘렸던 말이 바람을 타고 언덕을 넘을 때였다
 습관처럼 오던 문장들은 끊기고
 잊고 있던 대화가 톡톡 터졌다 
 뒤에서 누가 찼는지 정강이뼈가 저렸다 

 싱싱한 옥수수 껍질을 깠는데 알맹이가 몇 알 없었다
 징조가 더욱 명랑해졌다 

 떠도는 말들을 주웠다
 알록달록하게 덧입혀진 말들은 시큼들큰했다
 반들해진 몽돌말들을 주머니 속에 넣자
 차르르 차르르 파도 소리가 귓속에 가득 찼다
 각진 말들은 외딴 언덕배기에서 자둣빛 엉겅퀴로 피어날 것이었는데,

 하얀 탱자나무 꽃 같은 말들 진흙 속에 처박힌 말들 애걸하다 굶어 기진맥진한 말들 변명도 못하고 병상에 누운 말들 먹지 않아도 배부르는 말들 공들여도 자꾸 무너지는 말들 오리발 내미는 말들 암컷을 유혹하려 집 단장하는 수컷 바우어새의 뻔뻔한 말들
 결국 순순한 단두대에서 스러질 말들 말들 말들

 말들은 때때로 빛을 잃었다
 미소라는 윤활유도 없고 단내 나는 혀도 없는 나의 마른 말들
 오크통에서 오래 숙성한, 떫으나 부드러운 마고 와인 같은
 둥근 말들을 애정했다 
 장식이 화려한 말이 내 입술에 닿으면
 꽃잎을 떨어뜨리고 나뭇가지만 남았다
 침 바른 말 오버하는 말 미끌거리는 말 앞과 뒤가 다른 말 
 그리하여 밑둥이 썩은 말
 다정이 지나치게 고왔거나 심지가 빠진 말은 경계했다 
 가슴에 없는 말이라도 덧칠해야 빛난다는 것을 알겠다지만
 가끔은 바람의 파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골목은 바람이 작당하기 좋은 곳
 공갈빵이 부풀어 오른다

 그해 여름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커시드럴 코브 동굴에서 너와 내가 나눈 말은 함께 바라본 노을빛을 간직하고 있을까?
 우리의 최애 풍경은 타우포 호수 위 빨강머리 흑조 한 쌍의 밀어로 아름답게 남겨 두자꾸나
 하늬바람이 부추겨 파종하기 전에 말이야

 어떤 말은 단단히 기둥에 매어 놓고
 어떤 말은 지붕 위에 던져 풍장을 기다리고

 바람의 파종으로 
 관계는 애타는 가뭄이거나
 혹은 지리한 장마













 정 선 시인

 2006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외 

 포토시집 『마추픽추에서 띄우는 엽서』

 에세이집 『내 몸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