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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Vol.10 - 한보경

 


이름이 바다였던, 바다

 

한보경

 

 

   창구 데스크에 쌓인 껍데기 속에는 죽어가는 바다가 있다 다 써버린 다이어리 속에도 있고 벽에 걸린 지루한 오후 네 시에도 있다 풀어진 넥타이 페이즐리 무늬에도 있고 초점 흐린 안경알 너머에도 있다 

쓰고 버린 이름들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가며 껍데기가 되어간다 껍데기들은 바다와 한편이다


   이름이 바다였던 바다가 있었다 바다의 시작은 바다였다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이 바다를 부를 때, 바다는 감히 넓고 깊어 바다를 꿈꾼 죄를 말하지 않았다 컴컴한 파란과 걷잡을 수 없는 애증과 막막한 지루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침묵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인 줄 알아 지루한 이름을 운명처럼 사랑했다 이름은 곡진한 믿음이었다 


   가끔 이름과 이름이 부딪쳐 거품 같은 물보라가 일었다 이름의 등껍질을 뚫고 물빛 비늘들이 파란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벗겨진 비늘 자리 비릿한 핏빛 딱지들이 한동안 바다의 이름이 되었다 오래 절룩이며 걷는 이름이었다 


   바다는 바다 말고는 누구에게도 바다라고 부르지 않았다 감히 바다에게 선수를 칠 이름은 없었으므로, 바다라는 이름표를 단 이름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전 온몸으로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 어떤 이름도 밀칠 수 있다는 맹목의 신념에 몰입했다 가끔 바다는 이름과 한편이 아니었다 


   바다는 바다가 아닌 사람들이 어떤 이름을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이 시퍼런 멍이 바다라고 쑤군대는 동안 한 떼의 이름들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쓸려가곤 했다 쓰지도 않고 버리거나 잃어버린 이름들이 빈 껍데기가 되어 먼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 위로 아득한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바다가 눈부시게 따가운 것은 사금파리처럼 찾아야 할 이름의 조각들이 까마득히 묻혀 있어서다 쓰고 버린 바다의 한때를 잊지 못하는 한 떼의 이름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늦은 겨울 햇살이 이름이 바다였던, 바다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보경 시인

2009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여기가 거기였을 때』 『덤, 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