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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호 Vol.36 - 조은솔



 
나는 이제 자막이 필요 없어요

 조은솔





 꽃 모르고 덤비다가 쓰러진 적 있는데요

 꽃샘추위에 오들오들 떨고만 있으니까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아는 언니가 데려가 준 적 있는데요  

 속을 풀어 준다는 해장국집에서  
 뚝배기 안에 들어있는 걸 
 조심스럽게 
 꺼내 본 적 있는데요 

 몇 번이나 우려먹었던 건지
 숭숭 뚫린 고백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있더라고요

 믿는 구석인 줄 알았는데 
 몰리고 보니까 궁지더라고요 

 보는 사람마다 주소를 잘못 알려 줘서
 눈에 띄는 건 질투밖에 없었어요 

 나를 빛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입맛이 
 아무도 모르게 달아나서 
 그때부터 까먹을 만큼 조용히 살고 싶어졌어요

 이제는요 낮은 조명 아래서 혼자인 나를 봐요 

 혼자 재밌는 
 나를 틀어놓고 자막 없이 봐요

 아직 내 편 아닌 내가 
 늦게 도착하고 있는 나를 
 다짐하면서 봐요 

 보다 보면 번역 없이도
 끄덕이는 심장을 갖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듣다 보면 
 나도 모르는 마음에 
 귀가 생길지도 

 어쩌면 그날 고른 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조은솔 시인
 2023년《현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