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 신작시
  • HOME > 신작시 > 신작시

2024년 6월호 Vol.36 - 이병초



 
꽃송이

 이병초





 누구에게 얻어터져 눈두덩이
 퍼렇던 여자 초저녁인데 
 이미 취한 여자, 처음 보는 내게 자신을 
 ‘카수’라고 소개한 뒤
 소주를 쭈욱 들이켰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 돈 있다? 이러면서
 지갑에 만 원짜리를 꺼내어 천천히 찢어가면서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불렀다
 살짝 허스키한 음색이었다
 고향이 어딘지 몰라도 밑거름 먹은 들판의 
 해금내를 간직한 목소리였다 
 바람벽에 세든 쥐 오줌 냄새를 아끼는 것 같기도 했다
 포장마차 흐린 불빛을 빨아들이며
 음정을 느릿느릿 찍어 넘기는 목타루에 
 피 냄새가 엉기고 있었다
 누가 노래를 들어 주든 말든
 음표 한 개 한 개에 허투루 다가서는 법 없이 
 못난 세상에 격렬해지려는 
 목타루를 애써 참는 음색, 음색에 
 해금내가 되엉기고 있었다

 무교동 낙지 골목 근처에서 만났던
 그 목소리, 흐린 불빛에 젖어 반짝이던 해금내를 
 눈두덩 퍼렇던 꽃송이를
 1985년 여름 후로 만난 적 없다 









  
 
 이병초시인
 1998년《시안》으로 등단.
 시집『밤비』『살구꽃 피고』『까치독사』『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시비평집『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