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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호 Vol.36 - 김이녘



 타이머

 김이녘






접이막대를 길게 뽑는다. 겨드랑이를 쭈욱 펼쳤다 접을 때마다 극장 안의 초침이 째깍였다. 위로 늘어난 접이막대는 작은 바늘을 겨냥하기 위해 더듬거렸다. 단색의 정장을 입은 뒤꿈치의 높은 굽은 불편하게 딸각인다. 
작은 바늘은 한 칸 아래로 방향을 잡았다. 조절자는 어깨를 풀썩이며 천장을 뚫고 지붕 밖으로 박힌 시계 기둥에서 물러섰다. 정장을 벗는다. 벗겨진 뒤꿈치에서 물기가 돋는다. 기둥 옆에 굽이 높은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둔다. 덧나듯이 자라는 뿌리를 도려낸다. 흰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뿌리의 생장점은, 늘어난 겨드랑이 통증과 같은 박자로 톡톡 튄다.
공연을 보아야 한다. 숫자가 적힌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초침은 토독인다. 감자를 캐다 쓰러진 사체 한 구. 상의가 말려 올라간 허리를 드러낸 채 엎드린 피사체. 차갑게 식어서 흐르는 땀이 노란 조명에 반짝인다. 공연이 끝나가기 직전, 조절자는 무대에 다가가 피사체의 발목을 돌려 태엽을 감는다. 쇠감기는 소리가 끼익지잉. 백색조명이 파닥이며 가득 찬다. 관람객들은 엄지로 귓바퀴를 누른다. 네 손가락으로 눈과 코를 막는다. 입을 크게 벌린다. 
탈색되었던 무대가 다시 그림자를 채워가는 동안에도 천정에서는 소리가 쏟아진다. 적절한 음영을 만들었다. 밝음을 틈타 객석에서는 어깨와 머리통들이 뒤엉켜서 마르게 끈적이는 소음들이 듬성인다. 
조절막대를 천천히 뽑으며 기둥 앞에서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바늘의 각도를 조절한다. 는 피사체의 무대인사를 위해 널브러진 몸을 흔들어 깨운다. 박수와 환호, 또각이는 소리는 파묻히고 조절자는 정장을 입은 채 회전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짙어지는 그림자, 짙게 어두워지는 백색조명. 쌓여있던 감자포대들이 허물어지듯 일어서서 각자 발목의 태엽들을 감는다. 
지붕을 뚫고 나간 기둥에는 크고 무겁고 녹슨 태엽이 꽂혀서 간혹 부식된 철가루들이 귓바퀴에 내려앉기도 하는데, 그 아래의 관람객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귀를 막고 소리를 토하고, 복사뼈에서 뿌리의 생장점을 도려내는 일에 대해 길고 장황한 서시를 쓰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시각을 조절하지 못하는 길고 긴 막대에 경의의 감탄사를 무대인사로 남기기도 하는 것읻

(위 시는 작자의 의도대로 편집하였음)









  

 김이녘 시인
 2020년《시사사》로 등단.
 시집 『더께』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