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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Vol.07 - 우대식


우대식 시인

신작시 2, 근작시 3편, 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모자를 해체하다

 

 

 

겨울이 오면 의자를 바꿔 앉아

창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의자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지만

화덕도 바뀌었고 모자도 바뀌었다

모자가 바뀐 집 아이들은

나쁜 자본의 나라로 무언가 배우러 떠났다

 

서리가 내린 들판을 산책하며

모자를 해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자도 매일매일 해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여타의 생물과는 다르다는 나의 생각은 개조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배급받으며 살아왔다

두 손에 들린 그릇 안에

배급받은 몇 개의 생각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봄이 오고 의자가 바뀌면 몇 개의 풍경이 바뀔 것이지만

생각의 그릇 속에는 여전히 색이 바뀐 뱀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면 그 뱀들은 청순한 꽃이 되었다

화들짝 놀라 떨어트린 뱀을 주어 담았다

 

 

 

 

조롱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우대식

그 이름 씩씩하구나

그 노래 참 맹랑하구나

씩씩한 한 생을 살았구나

별도 달도 다 따다준다던 한 세상을 살았구나

그 씩씩함이 이제는 무섭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일까

그 이름 씩씩하구나

끝없는 말의 윤회 속에서 수레바퀴에 깔린 씩씩함은 점점

평평해진다

당신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머릿속의 모든 회로에는 전등이 들어온다

삼십 촉 정도의 밝기

깜박깜박 우물쭈물하다 보면

웃으며 알려준다

그 이름 씩씩하구나

나뭇잎이 모조리 져 버린 은행나무 위에서

새는 노래한다 조롱한다

그 이름 씩씩하구나

 

 

 

 

ㅣ근작시 3편ㅣ

 

託, 제이월당기第二月堂記

 

 

    4월은 온통 바람, 당신에게 바람의 편지를 보냅니다. 옛사람들은 방을 들이거나 움막을 지어도 기記를 썼습니다. 글 잘하는 벗에게 비를 맞고 총총히 달려가 집의 내력을 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기記를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즈음, 저는 제이월당第二月堂이라는 한 칸 반짜리 누각을 제 마음의 물가에 드리울 것입니다. 이월二月에서 삼월三月로 가는 길은 있는지, 동지冬至에서 이월二月은 얼마나 먼 길인지, 사월四月의 황홀에 대해서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 완강함과 대책 없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길도 알고 싶습니다. 온통 길이라 쓰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갑니다. 목이 움츠러드니 석양 아래 서는 일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길, 누추한 누각마저 부수어야 하는지 간절히 배움을 청합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가을 소리 내력

 

 

송귀뚜라미 조두루마기* 같은 명창들의 소리 내력을 따라

 

임계 장터 개울을 건너니 

 

가을이

 

히죽히죽 웃으며 서 있다

 

빛나는 햇살이 친구냐 물으니 그저 말없이

 

얼쑤 추임을 낼 뿐

 

구부구부 돌아갈 많은 것들이 산모퉁이 섯다

 

단봇짐 하나 씩 들고

 

가을의 눈치를 보고 있다

 

비가 내리면 가을비 사랑이 끝나면 가을 사랑

 

수리성이 위태롭게 끊일 듯 이어지고 있다

 

귀뚜라미는 죽은 이의 석상에 앉아 고개를 흔들며

 

색이 바랜 흰 두루마기 옷깃에 떨어지는 눈물

 

노래도 가객도 가을도 그 낮달도

 

팔십 리 산길에서

 

모두 머리 숙여 길 떠난다  

 

 

*조선후기 가객들의 별칭 

 

 

 

 

 

안개는 힘이 세다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 옹호자가 나온다

조금 있다가 자본주의자가 나온다

안개 속에는 많은 주의자들이 산다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자인 체하는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교회주의자인 체하는 완전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안개가 걷히면 자본주의자만 남았다

그게 뭐 대수냐고 누군가 중얼댔다

나는 자본주의는 힘이 세냐고 물었다

자본주의자들은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눈이 쏟아지고 앞을 볼 수 없었다

눈도 자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안개 속에서 히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는 고맙다

 

 

 

 

시인의 말ㅣ


시 사용설명서를 쓰고 싶다


 

   다양한 산문을 쓰고 살아왔으나 시에 붙는 산문을 쓰는 일이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이는 나만 그러한 것이 아닐 터이다. 네 권의 시집을 냈으니 다작은 아니었다. 각각의 시집에 실린 자서 혹은 시인의 말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으로 내 시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펼쳐 놓고 보니 첫 시집의 “숨은 신을 찾다 죽다”는 구절이 내 시 전체를 규율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구구절절 이야기 하느니 아래  길지 않은 <시인의 말>을 읽어보면 대강의 사정을 짐작할 듯 하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읽는다. 눈 맞고 서있을 정갈한 갈매나무를 나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타샤는 끝내 퍼붓는 눈 속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당나귀는 술에 취해 늙어갔다.  당나귀 등짝같이 부드럽고 즐거운 시간은 다 지나갔다.   시는 내게 음울한 집이며 동시에 숨은 신이다. 내 묘비명을 미리 써놓는다.
   “숨은 신을 찾다 죽다”
   이 시집을 오랜 연장이 담긴 아버지의 가방에 꽂는다.
                     첫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의 <시인의 말>

 

   사람이 나를 이끈다.

   허무가 나를 이끈다.

   그곳으로 갈 것이다.
                     두 번째 시집 『단검』의 <시인의 말>


   주막에서 보내는 날들이 저물어 간다

 

   가물가물한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다른 지옥으로 방랑을 떠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신을 만나고 싶다

   반갑고 슬프고 지랄 같은 눈발 속에서

   불온한  나의 생각은 용서받을 수 있나

   용서 받을 필요는 있나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세 번째 시집 『설산 국경』의 <시인의 말>

 

   오랫동안 신(神)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육신으로 빚을 갚았으니
   남은 생은
   땅 위에서 살겠다
   진창에서 살겠다.
                     네 번째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의 <시인의 말>

 

   앞으로 할 수 있다면 실학을 넘어선 시를 쓰고 싶다. 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브레히트가 보여준 전범이 있다. 시 사용설명서 한 권을 제작하고 싶다. 공산과 자본 사이 국경을 넘나들며 서정시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혹은 그만두어야 하는지 천천히 고민해 보겠다. 사실 근대 이후의 삶이란 언제나 아우슈비츠 아니겠는가?

 

 

 

 

 

 

우대식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

저서 죽은 시인들의 사회』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선생님과 함께 읽는 백석 해방기 북한 시문학사등이 있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