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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호 Vol.01 - 손택수




손택수 시인

신작시 2편, 근작시 3편, 시론

신작시 2

 연등

 

 

  

지리산 법계사에서 연하장이 온다

벌 써 몇 해째

 

한번은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그 많은 등산객 중 한 분이겠지요

처사님 이름과 주소로 해마다 누군가

등을 밝히는 모양이에요

성불하세요

 

어머니도 아니고 누이들도 아니고

아내는 더더욱 아니다

혹시나 싶어 짚어본 그 사람도 아니다

잊고 지낸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는 시간

알 수 없는 누군가, 로부터 나의 새해는 온다

 

누구인가, 내 일생의 시업도 그와 같았으면

새의 뱃속으로 들어가 새의 눈을 빛내는 남천 열매처럼

눈보라 치는 산정에 연등을 거는 손을 닮았으면

 

  

      

절정

 

      

  배구공이 바닥에 닿기 직전에 슬라이딩, 누가 봐도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공을 아슬아슬하게 살려낼 때나 솟아오른 공을 따라 도약한 선수들의 강스파이크도 좋지만 내가 압도 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네트를 넘나들던 공이 네트 위에서 딱 멈춰 섰을 때다 양쪽 최전방에서 튕겨오른 몸들이 팔을 들어올려 거의 동시에 공의 뺨을 얼얼하게 후려쳤을 때다

 

  공이 정지한 순간, 선수들도 동작이 동결된다 공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공처럼 벌어진 눈알들도 이 순간에 얼어붙는다 후끈한 열기로, 승패가 다 지워진 채, 환호도 낙담도 결정되지 않은 채, 오직 황홀한 망설임 가운데, 여기와 저기를 그리고 탄식과 환희를 또한 도약과 추락을 궁글려 뭉친 충만감 속에 꼼짝없이 붙들려 숨막히는 순간

 

  운동하는 정지의 근육은 얼마나 팽팽한 탄력 덩어리인가 이마에 땀방울처럼 맺혔다 떨어지는 공 하나가 온 세계를 쥐었다가 푼다

 

 

 

근작시 3

  

교감

 

 

공원 덤불숲이 가늘게 떤다

떨림을 꾸욱 누르고 있다

 

누구인가, 그만 튀어오를 법도 한데

등을 잔뜩 부풀린 채

어서 지나가주길 바라며

숨을 참고 있는

 

기척을 감지한 숲이 뚝. 떨림을 멈춘다

나는 멀찌감치 물러서기로 한다

 

너무 명백해지는 일은 없도록,

누군지 모를 그와

이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숲의 뜻이 아닌가도 싶어서

 

    

 

인어의 추억

    

 

앞가슴 단추 둘을 풀어헤치고 걷는 품속으로

벚꽃잎이 뛰어든다

 

순간,

스카프가 지느러미처럼 흔들린다

 

꽃비늘 하나로 묵직한 걸음이 유영으로 바뀐다,

바뀐다,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나를 설득 중이다

살다 보니 이런 순간들도 있다고,

 

꽃잎 하나로

가슴에 먼바다

밀물이

오르내린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뛰어오르던 지하철 출구

날리는 꽃잎이 입술을 첫 키스처럼 스쳤다 

 

 

 

심심을 찾아서

 

 

양념을 하긴 했는데

양념이 저 혼자 잘난척만 않도록

은근히 절제를 했다

 

맛과 맛 사이에 여백을 두어서

희미하게 단맛도 오고

쓴맛도 오고, 짠맛도 오고

당최 알 수 없는 맛까지 온다

을밀대 평양냉면이나

원주 살 때 자주 가던 흥업묵집 묵밥은

어딘가 허전한 데가 있었지

부러 채우지 않고 비워놓은 자리가 있었지

 

수줍어하는 맛이라고 할까

개성을 감춘 맛이라고나 할까

여러 맛이 와서 놀아라 심심

무얼 고집하지 않고도 이미

자신인 맛

 

     

■ 시론

    

활자인간과 시

 

 

우리의 필기도구들은 우리의 사유와 함께 작동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1

시인 박목월은 산문을 쓸 때와 시를 쓸 때의 필기도구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청탁받은 밥벌이 잡문이나 산문을 쓸 때는 볼펜이나 만년필처럼 속도를 낼 수 있는 필기구를 선택했지만 시를 쓸 때만은 애써 연필을 고집했다고 한다. 시인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 찬찬히 연필을 깎고 향을 맡으며 뭉툭했던 심을 예민하게 벼르는 단계를 충실히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시 쓰기에 진입하였다. 어느 날 시는 왜 꼭 연필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목월의 답은 이와 같았다. ‘연필을 깎으며 마음을 가다듬게 되지. 어떻게 마음가짐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열리는 거야’.

목월의 필기도구처럼 사유를 자극하고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하는 식으로 글쓰기에 개입하는 매체가 바로 글꼴이다. 글꼴의 몸가짐과 자태 혹은 고유한 분위기가 내용을 결정짓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장르가 바로 시다. 어떤 글꼴은 시의 흐름을 경쾌하게 하면서 앞으로 쭉쭉 밀고나가는 전진의 힘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글꼴은 꺼칠꺼칠한 질감으로 앞서가는 시행에 브레이크를 걸며 자성과 자중의 시간을 더 갖게 한다. 어떤 글꼴은 특유의 성대를 갖고 있어서 화자의 화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가령, 나는 동시를 쓸 때 유년화자의 유희를 응원하는 서체를 따로 갖고 있다.

활자 감수성은 더러 활자 자체의 상형성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자음과 모음 단위로 상상력을 풀어나가기도 한다. 가령, ‘은 수평선 위에 뜬 해와 달의 모습일 수도 있고 눈사람이나 오뚝이가 될 수도 있다. ‘이 기울면 ‘%’가 된다. ‘의 확신과 긍정에는 어느 정도의 회의와 질문이 늘 포함되어 있어야 탄력을 잃지 않는다는 뜻밖의 사유가 뒤따른다. 제도적 의미 맥락으로부터 놓여난 활자의 물질성이 전에 없던 새로운 의미를 견인하는 사례이다. 질료충동의 결과물들이 내게도 있다. 가령, 졸시자음(목련전차, 2006, 창비)은 언어가 단순한 소통 도구나 표현 매체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순환하는 유기적 생명체임을 알게 한다. 지게를 짊어진 인간의 노동 행위가 대지를 지면으로 한 글쓰기가 되면서 자음은 고추와 고구마를 낳는 생명활동으로 이어지고, 몸을 매개로 한 발음은 사라지는 소리의 무한 공간을 또 다른 매체로 각인시킨다. 일생의 노역 끝에 몸과 대지와 하늘의 총체성을 구현한 활자인간은 마침내 모태로 돌아가 삶과 죽음의 삼엄한 구분마저 지워버린다. 살이가 죽음의 일부가 되고 죽음이 살이의 일부가 되면서 서로를 되먹이는 우주의 질서 속에 활자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졸시모음(시집 미수록작)은 바로 활자인간의 꿈이 지향하고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죽음 체험 속에서 언어는 최초의 모음을 혀에 올리는데 이때의 기호란 수십 수백 세대에 걸쳐 유전자에 각인된 채 우리 몸속에 저장된 아련한 향수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모음은 인류가 제도언어를 갖기 전의 아득한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동면이 생명활동의 일부이고 죽음 역시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듯이 언어는 언뜻 활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침묵과 무한을 배경으로 할 때 신생을 경험할 수 있다. 활자인간의 향수병은 결국 시원과 미래를 동시에 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도심의 병원에서 태어나 아스팔트 킨트나 모니터 킨트로 성장기를 보낸 세대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향수병은 있다. 일종의 문화적 유전인자가 환지통처럼 작동하고 있는 강력한 사례라고 해야할 것이다. 바다를 본 적이 없으나 우리는 바다에 이끌리고, 수십 억 광년 너머의 별과 그 어떤 인연도 갖고 있지 않으나 별과 눈을 맞춘다. 우리의 몸속엔 바다의 성분과 같은 물이 출렁이고 있고, 별의 물질과 같은 성분의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시원과 우주의 비의를 간직한 자녀들이다.

    

2

근원적 향수와 실존감을 가로막거나 왜곡하는 것이 제도언어다. 제도언어는 자동화와 기계화가 그 특징이다. 파도는 항상 푸르기만 하고, 토끼는 깡충깡충 뛰어다니기만 하며,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기만 한다. 사물 세계는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가능태들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그 실상에 쉬 눈을 감는다. 그리하여 언어는 딱딱한 각질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장미란 말은 빛깔도 향기도 가시의 날카로움도 없이 버젓이 장미 행세를 하고, ‘이란 말은 촉의 우아한 곡선미나 특유의 맵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자신을 주장한다. 사물의 독자적 실존과 개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개념과 추상의 뼈다귀 밖에 없다. ‘장미이란 개념의 세계는 결코 장미와 난을 알지 못한다.

사유를 작동케 하는 역할도 하지만 사유를 길들이고 통제하는 역기능을 가진 것이 미디어다. 인류사와 함께 한 모든 미디어의 운명이 그렇다. 비판적 성찰이 빠질 때 미디어는 소통과잉으로 소통을 억제하고 정보과잉으로 정보불감증을 낳고 테크놀로지 과잉으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한다. 조지오웰의1984는 보이지 않는 지도자 빅 브라더의 지배 아래 통치되는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하는데, 이 소설에서 튜브는 모든 인간적인 관계를 끊는 소통도구로서 상징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작업장에 설치된 튜브를 통해서만 지시를 받는 수동적인 개인으로서 철저하게 통제된다. 인간은 이제 단지 노동하는 동물로서 거대한 체제의 부속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제도화된 언어와 매체는 자발적 노예화를 부추긴다. 기존의 언어가 지닌 자명한 존재방식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세잔은 사과 하나를 그리기 위해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과 엄청난 전투를 벌여야 했노라는 인상적인 고백을 남기고 있다. 문화적 관습으로 내려오는 사과의 상징을 지우고, 선배들의 표현방식을 지우고, 학습된 사과의 형태와 색채까지 지워야만이 나만의 사과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비둘기를 보면 평화라는 관습 의미를 지우고, 환경부 지정 위해 조류라는 정보를 지우고, 비둘기와 노숙에 관한 어떤 시인의 시를 지우는 과정에서 마침내 부리가 깨어진 채로 포도를 종종거리고 있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비둘기의 실상이 드러난다. 이 같은 방법은 티베트의 모래 만다라를 연상시킨다. 티베트 승려들은 색색의 모래들로 찬란한 만다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모래알은 쉽게 흩어질 수 있으니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힘들여 작업을 하고 난 뒤엔 그 이미지를 단번에 지워버리거나 물에 흘려보내고 만다. 이미지의 완성은 마지막 순간의 지움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색색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 너머에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는 집중의 과정 자체이지
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미노를 공들여 세운 뒤의 붕괴가 주는 해방감, 모래성을 쌓은 뒤 파도가 무너뜨릴 때의 쾌감 속에는 이러한 방법적 망각으로서의 유희가 있다.

시인들 역시 망각의 유희 속에서 작업을 한다. 처음에는 제도의 언어들을 학습하면서 미감을 형성해나가지만 어느 순간 습득한 상징계의 언어들과 실재계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면서 균열 체험을 한다. 균열은 확정적인 개념들을 불확정의 지평으로 돌려놓고 엄숙한 경계선들을 부드럽게 횡단케 한다. 기호의 각질은 벗겨지고 싱싱한 미완의 속살이 드러난다. 미완은 이제 완성의 결여가 아니라 완성이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지향점이 된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모험 속에서 시는 지도 속의 경계선들을 풀잎처럼 뒤흔들고 그 떨림을 간직한 채로 경계선 자체를 새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시의 미지다.

안상수의 <언어는. 별이었다.......의미가. 되어...,. 위에. 떨어졌다>(1997, “안상수.....로댕갤러리 도록)는 시의 미지가 어떻게 타이포그래피와 행복한 만남을 갖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음절을 자소로 분해한 후 의미를 지운 채 형태 그 자체로서의 속살을 드러나게 하는 안상수 타이포그래피의 이념 속에도 방법적 망각의 유희가 있다. 안상수 이전에 우리 모국어의 천체를 회전하는 활자 행성들은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엄격한 선형적 질서 속에 있었다. 옴쭉달싹할 수 없는 글자 행성들이 궤도를 이탈하여 우주를 가르는 섬광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안상수를 만나면서부터다. 그의 시도는 우리의 활자 은하에 꿈꿀 권리를 주었다. 우선, 관습적 의미의 궤도로부터 놓여난 모음 은 인류의 무의식처럼 깊은 심연의 어둠 위에서 옹알이를 하는 별이 된다. 이 별이 의미의 개입으로 추락한 지상의 과 병치되어 있다. 지상의 은 상처가 있어 흐릿하거나 뭉개져서 본연의 찬란한 광채를 발하지는 못한다. 양자 사이의 균열을 통해 우리는 문명사적 흐름을 조명하면서 지상과 천상의 신화적 명상 속으로 문자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 옛날 프랑스의 성당들은 하늘의 처녀좌가 지구에 반영된 표시를 나타내는 위치에 세워졌다. 경복궁을 포함하여 우리의 궁궐들 역시 오성좌를 본 뜬 모양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 옛날엔 별들이 건축 설계사였던 셈인데, 집을 짓는 일을 하나의 우주적 사건으로 여겼던 고대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안상수의 활자 별들 역시 그 오래된 신화를 오늘의 삶과 견주면서 들려준다.

다만, 여기서 표제의 분명한 선언과 달리 텍스트 자체는 일면적 의미로 확정되는 걸 망설이는 판단정지의 상태에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저 우주의 심연과 교감하는 지상의 별들이 뿜어내는 위의가 결코 만만치 않다. 비록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추락하였으나, 추락하였기 때문에 추락 이전에 대한 동경도 일어난다는 역설이 가능한 것도 사실 아닌가. 제도언어 속에도 별의 기억은 남아 있고 새로 태어나는 별자리들도 언젠가는 제도언어의 숙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여전히 기호 너머의 별은 그래서 그리움과 상처로 남는다. 시가 의미에 감염된 채로 감염을 각성하면서 감염된 몸으로 감염 이전을 살고자 하는 역설의 장르라는 말이 이와 같다. 이 저주받은 운명이야말로 우리를 늘 꿈꾸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타이포-의 연맹 가능성을 나는 여기에서 찾고 싶은데, 안상수의 텍스트는 이처럼 여러 질문들을 잉태한 채로 저마다 해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지를 결코 잃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안상수가 자주 언급하는 말라르메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 말라르메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관계가 자동적으로 한눈에 드러나지 않도록 문장 안에 불투명 유리창을 설치하였는데, 개념화를 억제하는 이 불연속적인 문법이 상징주의 이미지를 의미의 중층결정 상태에 있게 한다. 가령, 명백한 전깃불은 환해서 좋지만 어둠을 추방함으로써 단순해져버린다. 이것이 지시대상과 언어를 의미로 잇는 산문의 세계다. 그러나 촛불은 어떤가. 촛불은 어둠을 밀어내는 듯 하면서 아주 쫒아버리지는 않고 이웃으로 가까이 둘 줄 안다. 훨씬 아늑하고 암시적인 기운이 생겨난다. 이것이 지시대상과 언어의 관계를 일의적 의미 결속으로부터 놓아주는 시의 세계다. 여러 뜻이 겹쳐 있는 시적 애매성의 공간은 명백한 개념들에 대한 반성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고, 진리에 대한 회의와 자신의 언어에 대한 망설임 그리고 명약관화하게 정리해서 보여줄 수 없는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안상수의 타이포-가 지닌 비의를 나는 여기에서 찾는다.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고 끝없이 생동하는 비의의 발동 방식을 굳이 말하자면 재배치의 수사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세계를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반복되는 일상 세계는 수없이 왔으나 처음 도래하는 다른 세계로 도약한다. 다른 세계는 여기의 세계에 깃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봄이 오면 커튼의 빛깔을 바꿔 공간 변화를 이끄는 삶의 기교처럼 세계는 구조를 부수는 어수선한 소란 없이도 재문맥화된다. 늘 다니는 골목길과 일터와 거래처가 그대로여도 주체의 위치와 행위를 바꿈으로써 일상은 그 어떤 여행 못지않게 새뜻한 산책이 될 수 있다. 그 길은 그냥 걷는 산문의 포장도로가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는 단절되고 단절이 있기에 도약도 있는 징검다리와 같은 길이다. 가령,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기형도, 엄마 생각)에서 해가 시들다는 낯선 결합은 식물적 이미지를 해와 연결시키는 마술과 함께 집안에서 해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의 문맥을 너저분하게 나열하는 수고 없이 간결하게 압축해서 보여준다. 재배치의 전략엔 이와 같이 언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절제와 응축이 있다.

이 절제와 응축 속에서 침묵이 살아난다. 침묵이 있어야 울림이 있다. 언어가 침묵을 저버릴 때 언어는 소음이 되기 쉽다. 이 침묵에 대한 경청이 여백의 중시다. 안상수에게서 여백의 존재성은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활자나 행에 의해 생기는 것이 여백이 아니라 오히려 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활자가 생겨난다. 저 활자 별들의 자궁이며 무덤인 어둠의 깊이를 보라.

      

3

바다 속에서 전복 따 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 전복도 제일 좋은 건 거기 두어라/ 다 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 두고 바다 바래여 시인인 것을”.

서정주는 그의 시론을 압축한 시 시론에서 시와 전복의 비유를 쓰고 있다. 제주 해녀에게 바다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일터, 즉 일상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님을 위해 귀한 전복을 부러 따지 않고 묻어둔 곳이 바다이기에 바다는 일상의 지루한 반복으로 파도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후렴으로 파도친다. 시인이 일상 속에서 신화나 우주, 있어야 할 꿈의 세계를 있게 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일상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지금 여기이면서도 저기가 될 수 있다.

이 바다를 찾아 우리는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김일영 시인의 처녀시집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의 디자인 작업을 위해 시인의 고향인 완도 생일도를 찾은 날이었을 것이다. 시인과 시집과 시를 잉태케 한 시의 구체적 장소를 하나로 잇고 싶다는 디자이너의 주장에 이끌려온 여행이 마냥 편할 리가 없었다. 오직 디자인만을 위해서 시인과 디자이너 그리고 에디터까지 동행을 한다? 한국 출판사들의 영세성과 속도주의, 실용주의를 염두에 둘 때 그것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기획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돈키호테고 누가 산초판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에디터인 내가 바로 긴 여정을 묵묵히 수행하는 당나귀 로시난테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출판사의 가시 돋친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풍차 거인을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의 광기와 저만치 거리를 두고 따르는 산초판자의 아이러니 사이에서 나는 그래도 시만이라도 서점 매대에서 화려한 표지와 띠지 같은 수사로 자신을 광고하는 로망스형의 도취가 아니라 스스로 상품이 된 걸 부끄러워하는 담백한 각성의 리얼리티 속에 있자는 주문을 간단없이 걸어야 했다.

섬에 내리는 나른한 햇살 속에서 문득, 시인이 말했다. 수평선이 시인의 눈썹처럼 펼쳐져 있었고, 어린 시인을 키우던 대숲 바람 소리가 불어오고 있었다. 친화력이나 소통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자폐적 기질의 깡마른 그는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 만에 처음 귀향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피해 섬으로 온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굴곡이 많았던 성장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가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들려줄 때 디자이너는 그 모든 것이 시라는 듯이 듣고 있었다. 디자인에 이야기가 개입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화학반응 같은 것이 덤덤했던 우리 사이에 이루어졌으리라. 그것은 'Arp237' 같은 정보 밖에 없는 별자리에 옛하늘의 이야기가 살아나고, H2O라는 화학식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물에 포세이돈과 유화와 님프의 개성적인 이야기들이 살아나는 것과 같았다.

이야기 끝에 시인은 수줍게 고백했다. 처음 시를 쓰던 날의 서체가 안상수체였다고. 그때, 동백이 졌던가. 동백나무 아래 빈 비료 포대 위에 통꽃 째로 떨어지는 꽃숭어리가 툭, 죽비소리를 냈던가. 디자이너는 심각한 얼굴로 정색을 하고 저 동백꽃잎 지는 소리를 담아가자고 했다. 동백꽃이 피었다가 지는 소리를 그대로 진공상태로 포장해서 서울까지 가져가자고 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절박하고 간절해서 하마터면 나는 정말 어디 가서 비닐봉지라도 구해와야 하는 것이 아닌하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순간에 소멸하는 동백의 낙화음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설령, 담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때 그 순간만의 고유한 울림과 그 울림에 공명하던 심적 상태를 반복할 수 없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다가 그냥 마음에 담아가셔야죠, 라고 하였으나 얼마나 어리석은 답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절박함과 간절함, 불가능한 꿈으로부터 시와 디자인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활자 인간이 쓰는 타이포-도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그날의 바다는 섬을 축으로 수평선을 구부려 둥근 모음처럼 우리를 안아주었다. 어머니의 배 위에 배를 얹고 깊은 잠에 들 듯 자장노래처럼 들려오는 파도 소리 끝에 참으로 오랜만의 안식과 꿈이 찾아들었다. 그때 우리가 만난 바다는 ‘o’의 먼 조상인 옛이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연주법을 잃어버린 악기처럼 소리는 사라졌으나 활자는 남아 우리는 몽상의 바다를 유영한다.

아마도 그 여행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그가 하나의 인간 활자로서 세계를 서체로 디자인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가 팔을 들어올리거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갈 때 나는 하나의 글꼴이 살아 움직이면서 공간을 자신의 몸에 맞게 조율하고 있음을 안다. 그가 있으면 들판에 외따로 서있는 미루나무처럼 훤칠한 전망이 생겨나고, 해풍을 만나 구불구불한 바닷가의 소나무처럼 리듬이 일어나고, 냉이 뿌리가 그러쥔 대지의 심연이 알싸한 향을 뿜어낸다. 온몸이 활자화 된 안상수 식의 활자 감수성을 통해 우리는 몸과 세계와 언어의 존재방식을 캐묻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옛 시인들의 말대로 무지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안상수의 타이포-는 무지개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손택수

1998한국일보()국제신문(동시)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무의 수사학목련전차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나의 첫소년등이 있음.

조태일문학상, 노작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임화문학예술상, 이수문학상, 현대시동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