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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호 Vol.06 - 유종인



[ 조선그림 반려화 이야기 ]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와 친구 이야기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경), 임희지(林熙之 1765~1820년 이후), 조선 19세기 초, 비단에 먹과 옅은 색, 91.0 × 34.0cm, 개인 소장.



김홍도(金弘道), 〈죽하맹호도〉 견본 채색 91.0 × 34.0cm, 개인 소장. 〈죽하맹호도〉부분.

 

 

 

   산숲의 지존이자 임금이라 하는 호랑이를 본다. 그러함에 나는 예전의 호환에 대한 두려움을 오늘의 두려움처럼 문득 돋울 때가 있다. 무슨 일인가 하면 호랑이는 멸종됐다는데 아직도 내 두려움의 일종은 아직도 대자연과 대도시에서도 관념을 넘어 돋아낼 때가 있다. 야생과 세속의 호랑이를 살아있다 하는 것은 무슨 엉뚱한 착종의 언사라 할 수 있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분전하는 일상의 호랑이들로 분전할 때가 있다. 생활이라는 호랑이가 언뜻 뛰어들 때가 그대는 없는가. 왜 그런고 하냐고 스스로 묻는다면, 두려움과 용기의 부족이 호랑이한테서 발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적할 수 없음에 당연 무섬증이 돋고 움츠러들고 꾀를 내지만 호랑이 그 자체를 대적하거나 넘어설 수 없을 때 호랑이는 여전히 가상이 실상처럼 일어난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나는 한번 산군(山君) 범에게 크게 화통한 친교를 청해보자고 작심을 내어본다. 단도직입적으로 호랑이와 친구를 내보자는 것. 호심(虎心)을 알고자 하면 산군(山君) 범선생도 내 협량한 인심 속량을 넘봐야 한다. 그러할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호랑이에 두려움이 창창하고 한 아가리에 물려 들여질까 본능이 소름 돋고 살과 내장과 뼈까지 떨다 정신이 아뜩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번 발심과 작심이 휘둘리고 흔들리는 것을 다잡아 호랑이군(君)에게 친구를 가일층 청해보자고 한다.
   18세기 조선에서는 호랑이가 산에서 나오는 출산호(出山虎) 스타일의 호랑이 그림이 풍미했다. 주역(周易)에서는 호랑이가 몸을 사려 감추고 털갈이를 한 후 변모한 것은 대인군자가 훌륭하고 영명한 면모를 갖춘 것으로 비유하기에 이르렀다.
단사(彖辭) 천택리(天澤履) 괘에 드러나는 호랑이의 비유는 그 은유적 괘사로 재미있다. 호랑이란 자연물의 위험성을 운명(運命)의 여줄가리를 크게 떨치는 대상으로 그 괘사(卦辭)에 등장하니 조금씩 친근해진 맛이다. 그 괘사는 리괘(履卦)인데 천택리(天澤履)로 부른다. 그 괘사는 ‘호랑이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이 물리지 않는다, 형통하다 (履虎尾 不咥人, 亨)’ 라는 개요를 지닌다. 은유가 드리운 괘사인데 인간의 처지가 갖는 운명이나 상황의 형세를 개략한 은유의 문장같다. 그런데 여기서 호랑이는 사리분별이 있는 숨탄것으로 등장하니 야생의 포악한 맹수에서 훌쩍 벗어난 혜안의 형형한 눈빛을 지닌 영물(靈物)로 등극한다. 이렇게 철리(哲里)를 풀어가는 주역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세속의 포악한 일방의 편벽한 짐승만이 아니다. 죽고 죽이는 것은 두려움의 관계가 짓는 상호적 역할이다. 잔혹극의 출발은 이 두려움을 매개로 애초 활발해진다. 이럴 때 호랑이와 사람 사이에 서로 공생의 연문(緣門)을 여는 것이 인문학적 교감의 실타래가 풀릴 때이다. 무서움과 두려움을 조금씩 돌려세우는 것이 나약한 인간이 삶의 돌파구적 상식이다. 피해의식을 보상심리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종교의 씨앗이다.  
   예로부터 상시적인 큰 두려움은 외경과 저주의 대상이면서 영험을 위한 교감의 대상이었다. 이는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일방적인 두려움에만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모종의 결단이다. 인문학적 포용의 대상이 된 호랑이는 마냥 무섭지만은 않다. 흔히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식의 유심론이 여기 결부된다. 호랑이에게 두려움을 유보하고 사람에게 인식의 여줄가리를 넓혀주는 것, 여기에 인문정신의 너름새가 있다. 두려움에 숭고함이나 영험함의 계륵을 붙여 관대함으로 넓히면 그것은 상생의 터울이 생기는 관계다. 그러한 상극과 갈등의 관계를 불식시켜 나가는 단초를 나는 무릇 친구의 눈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호랑이를 섭외한 주역의 리괘(履卦)의 괘사는 마냥 낙관적인 전망만을 드러내진 않는다. 주된 낙관의 전망이 실효적인 낙관이 되느냐 비관이 되느냐는 결국 사람이 펼치는 실행에 따라 상황은 언제든 바뀌게 된다. 괘사에 따른 변전의 계기를 경고하는 효사(爻辭)인 육삼효(六三爻)는 다시 호랑이와 사람의 관계를 은유의 문장으로 부연하듯 한다. 그 효사는 ‘애꾸눈도 잘 보며 절름발이면서 능히 밟는지라 호랑이 꼬리를 밟고 사람이 물리니 흉하다. 무인이 군주가 되려는 것과 같아 위험하다.(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凶 武人爲于大君.)’ 라는 효사로 경계를 삼을 만한 변전의 상황을 예시한다. 앞서의 괘사는 호랑이는 자신의 꼬리를 밟아도 사람이 물리지 않는다. 그런데 후자의 효사(爻辭)의 호랑이는 자신의 꼬리를 밟은 애꾸눈과 절름발이의 서슴없음에 덜컥 그 사람을 물어버린다. 무엇인가 두렵고 무엇이나 두려운 것은 아니다. 친구는 어디까지 친구이고 어디까지 친구가 아닌가.
   무속신앙의 산신도에서도 산신령과 함께 등장하는 흰 호랑이는 포악하고 사나운 최상위 포식자의 이미지를 훌쩍 뛰어넘어 영검(靈劍)을 지닌 산령(山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무서운 호랑이의 본능적 야만성을 거느리되 그걸 탐식의 도구로만 축소시킨 채 인간세속의 어지러움을 간정시키고 간난고초의 삶에 기복의 숭엄한 발복(發福) 대상으로 삼으니 이도 또 다른 친숙함이다. 두려움을 두려움에만 묶지 않고 홍복(洪福)과 영험으로 전환하는 마음의 전기를 이루었다. 친구는 이렇게 오래 걸린다. 친구라는 말의 어원은 어쩌면 이런 그 친구 맺기까지의 어려움과 늦됨을 품고 있는 거나 아닌가. 그래서 새삼 그 그 한자를 풀자면, ‘친할 친(親)’이되 ‘옛 구(舊)’이며 동시에 ‘두려울 구(懼)’가 아닐까 의역을 품어본다. 모든 친구(맺기)는 오래도록 두려움과 친해진 것. 여기에 내밀한 믿음의 도래샘이 솟아 세간은 그 마음의 물맛을 서로 나누어 온 것만 같다. 
   수월헌(水月軒) 임희지(1765,영조41- ?)의 바위를 뚫고 나온 듯한 굳센 대나무와 단원 김홍도의 섬세하고 굳세고 늠름한 용호(勇虎)는 의젓하고 의연한 풍모로 다시 세속을 깨우치러 나온 산군이자 산신(山神)의 표상(表象)으로 발걸음하는 호랑이다.
이러한 그림에 드러나듯 호랑이에 근엄함과 용맹함과 숭엄한 대인군자의 기질, 사악함을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영험함을 부여한 것은 호환(虎患)의 두려움 속에서도 끝없이 친구 맺기를 청하는 당대 조선인들의 두려운 용기인 것이다. 두렵지만 다 두렵지만은 않겠다는 의젓한 인간의 맘이다. 친구는 때로 친숙하기 전에 두려웁고 두려우면서도 다정한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외딴 감정을 넘어야 영험과 다정(多情)이 번져나오는가. 그러니 호랑이나 서시(西施)나 양비귀 같은 대상이 친구가 아니다. 그보다 모든 끌리는 대상을 향한 그 처음과 끝을 마주하는 인연을 맺기까지의 갖은 두려움을 마주해야 한다. 두려움은 공포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적 질곡들을 포함한다. 그러니 세상 무엇이든 친구를 갖자는 것은 두려움을 받자하듯 품는 것이다. 두려움이 친구다.  
   정치(精緻)하게 호랑이를 그리려면 호랑이를 잘 그리기를 넘어 호랑이를 알고 느껴야 했으리라. 그러니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호랑이에의 외경과 두려움을 아주 비켜나서 관념의 붓질로만 호상(虎相)을 대신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화폭 속에 끌어들이는 호랑이와의 친교는 호랑이에의 두려움과 그 위엄과 용맹함과 영험(靈驗)함을 사귀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친구는 이럴 때 한없이 넓고 깊고 외곬처럼 마주하는 마음의 마련이 앞장서야겠지.
 핫도그 하나를 길거리에서 물고 그 설탕이 입가에 묻은 것을 혀끝으로 털어내면서도 한끝 나는 떠올리는 것이다. 어느 새 호랑이가 그 붉고 주걱 같은 혀로 사람이든 토끼든 담비든 잡아먹은 뒤에 입가의 터럭에 묻은 핏방울을 쓸어 핥아먹는 걸 떠올리는 것이다. 산군 호랑이와 인물 사람이 한 초식으로 끼니와 군입정을 마주하고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것인가. 그렇더라도 그립게 그리는 이는 그 떠올림이 점차 깊어지고 가까워져 한 그림에 돋아나는 기운을 벗처럼 마주할 것인가. 단원(檀園)이 그리했던가. 나는 알 바 없으나 단원도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짐작은 어느 새 동감이 되어 그 단원이 화필을 들었던 시간에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호랑이를 웃기려는 것도 호랑이의 미소를 이끌어내는 것도 호랑이의 사나운 포효를 불러내는 것도 호랑이와 사람을 따로 두는 격절을 어느 정도 뛰어넘을 때 그 실감이 이웃할 것이다. 절간 한켠엔 외딴 산신각이 있다. 산군님 출산호도(出山虎圖) 호랑이를 곁눈질하듯 바라며 비는 마음. 사람의 눈에 든 호랑이는 또다른 눈부처이다. 자꾸 눈에 들어야 한다. 마음에 들어야 한다. 들락날락하여야 한다. 임희지와 김홍도의 합작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는 실감하는 대나무와 절감하는 호랑이가 어울리는 합작이다. 황색 털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마치 호랑이의 가만히 노리듯 도사리며 웅크린 몸바탕에 우리나라 한반도 산맥 그 대간(大幹)을 진설해 놓은 듯하다. 호박(琥珀)을 박아넣을 듯 거기 일심(一心)의 눈동자는 형형하여 상대를 옭죄듯 단숨에 그러쥘 것만 같다. 온몸을 덮은 빳빳하고 탄력있는 터럭은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발광하듯 사방으로 뻗쳐 모종의 기운을 발산하듯 호피(虎皮)에 솟았다. 몬존한 호랑이를 깨워 영험과 용맹과 지략을 더한 호랑이가 씌인 듯하다.
   여기에 발문을 쓴 문인 황기천(黃基天)은 화폭 우측 상단에 쓰여있다. 내용인즉 ‘세상 사람들은 간혹 호랑이를 그릴 때 개처럼 될까 걱정한다. 이 그림은 도리어 진짜 호랑이가 자괴감을 갖게 한다. 조선의 서호산인 김홍도가 호랑이, 수월옹 임희지가 대나무를 그리고, 능산도인이 평을 한다. (世人罕畵虎憂狗之似. 此幅却令眞虎自愧. 朝鮮西胡散人畵虎, 水月翁畵竹, 菱山道人評).’ ​위의 묵서가 말하는 바는 그림에 대한 극찬이지만, 그 속내엔 친구란 곧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화답하는 듯하다. 단순히 잘 그리는 것만을 이르지 않는다.
   화폭 속에 대나무와 호랑이와 묵서가 어울리듯 친구란 어쩌면 서로 두려운데 기꺼운 것이기도 한 것. 다정함이 들면 두려움은 곁에 두어도 그만그만한 것. 화락(和樂)은 화평한 세속에서만 있지 않고 두려움과 갈등과 해코지와 반목과 질시가 만연한 세속인 가운데 도리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돌멩이 하나를 가붓하게 주워드는 것 같은 것. 새로 돋는 해의 시간 머리에 문득 호랑이 그림을 마주하고 내 오래된 두려움을 어찌 누그러뜨려 소심함을 조금 바꿔 펼쳐볼까. 전전긍긍하는 가운데도 내 왜소함을 널리 아량하는 벗이 호랑이 눈에 나비를 들이고 슬쩍 곁을 주러 오지 않을까 헛된 바람을 켜기도 하는 것이다.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당선.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숲시집』,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답청』.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