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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빛은 위로 / 권현형 시집


 

 

 

 

 [책 소개]


 권현형의 시를 빨리 읽어 스쳐가는 사람들은 진하고 어둡고 달콤한 비밀의 언어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권현형의 시를 비밀에 가슴 아린 사람의 글이라고 해도 좋다. 시가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유력한 힘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창문 앞에 서는 사람은 시의 언어를 주사, 빈사, 계사로 읽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들을 함께 묶어 비밀을 경험하려는 사람이다. 아름다움이 항상 감각을 바꾸고 옮겨놓는 일이라는 것을 권현형의 시를 보면 알게 된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은 바꿈과 옮김을 통해 뜻하지 않았던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것들의 아득한 감각을 환기하고 감촉시키면서 “아마도 빛은 위로”는 이 옮김의 행위를 아득함이라는 정서로 바꿔놓는다. 때로는 매우 깊은 감정이어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이 정서의 율동 때문에 ‘아프고’ ‘기다려야 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세계 모든 동일성과 이질성을 한데 묶는 마음의 자리이다. 

-박수연(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시인의 말]


 자연스러운 모든 순간에 생기가 들어 있다.

 시를 쓰는 동안 눈이 내리고 비가 들이치고

 햇볕이 등에 내려앉았다.

 빛은 어둠을 닮아가고 어둠은 빛을 닮아갔다.

 화분에 물 주는 소리에 귀가 맑아지는 아침,

 아주 조금씩 다시 살아났다.

 느린 한 사람이 쓰지 않는 가계부를 쓰듯

 빛과 어둠의 일상을 기록했다.

 어둠의 총량이 운명의 총량은 아니다.

 두터운 사랑을 확인하느라 파멸하지 않았으므로

 나 자신과 제법 동지가 되었다.

 좋은 음악은 귀가 아니라 정수리로 들어온다. 그건 그렇다 

 하여도,

 내 시가 좋은 음악과 닮아가는 창조적 혁명의 순간은 언제 

 오려나?


 2023년 11월 ,  권현형


 


 [시집 속의 시]

 

 아마도 빛은 위로

 

 

 빛의 총량이 운명의 총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보라가 고혹적인 것은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일 거다

 꽃집 주인은 보라색 꽃이 강하다고 했다

 천천히 시든다고 했다

 

 멀어져가던 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가 그렇듯

 모든 것을 껴안고 있는 눈동자

 

 어둠을 싫어하는 네가 어둠 속에서도 그리 빛나더니

 잠 속의 통각은 바깥보다 아프다

 가슴 한복판이 끌로 도려낸 듯 아려와 새벽에 눈을 떴다

 청동 그릇에 새겨진 물고기처럼

 해가 길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천천히 시드는 색감의 운명을 사랑하고 싶다

 여름꽃을 한 아름 안겨주고 너는

 난생처음 보는 여행자처럼 오른쪽 등의

 지도 무늬까지 지우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진하고 더 어둡고 더 달콤한 여름꽃의

 전조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끝난다

 

 

 

 밤의 카자르 사전

 

 

 내가 조금 망가져 있을 때

 카타르행 비행기를 보고 카자르 사전*을 떠올렸다

 바다 위로 날아가는 금속 물체가

 해가 질 때 눈물을 흘린다는 고래로 보였다

 

 요가와 명상을 할 때보다

 마그네슘을 먹었을 때 포유류는 더 너그러워진다

 

 놀이터 어둠 속에서 네 시간이나 기다리다니

 허리를 구부리고 세수를 하는 엊저녁 네 모습이

 거울의 구부정한 잠언 같았던 이유를 알겠다

 

 너는 아마도 소수 민족의 후예일 것이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지키는 일과

 기다리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동일한 기쁨이자 고통이므로

 

 말이 어눌해서 아름다운 너의 연애 덕분에

 겨울 정원의 외로운 얼굴을 잠시 사랑하게 되었다

 유리병에 담긴 바다와 같이 유리병째

 

 파랗게 부서지고 있는 나 또한 균열을 멈추고

 깊이 잠들었다다시 마그네슘이 필요한 아침이 자랄 때까지

 

 밀로라드 파비치의 소설.

 

 

 

 사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아침부터 바람이 많이 불어왔을 뿐이다

 긴 리본이 매달려 있어

 하루가 길고 복잡했을 뿐이다

 

 뼈와 육체가 바뀐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4월보다 너는 조금 더 들떠 있었고

 아무 흠 없는 조개껍데기처럼 유난히 예뻤을 뿐

 꽃의 동공이 흔들렸을 뿐

 

 너를 버린 못된 손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사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끝내 닫힌 창문을 밀고 나오지 못했던 너의 

 네가 늘 머리맡에 두고 자던 씨앗 같은 것이었음을 믿는다

 

 접시를 만지면 접시가 물이 되고

 계단에 걸터앉으면 계단이 물이 되고

 침대에 누우면 침대가 물이 되고

 누울 수도 설 수도 없이

 

 네가 마지막으로 전송한 문자 이 심장에 말편자처럼 박혀

 

 *체로키 족 인디언들의 달력에서.


 


 권현형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경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꽃아』 『포옹의 방식』 『아마도 빛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