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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나는 당신 몸에 숨는다 / 한성희 시인

 

 

 

    한성희 시집/나는 당신 몸에 숨고 싶었다(시작/ 2020.03) 

 

 

 

 

배후 외 3편 

 

한성희

      

이건 아득해지는 새라고 생각하면

타인의 죽음을 예행연습 중일 거라고

 

한 생애의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작심한 듯

깃털 하나를 던지는 비둘기처럼

 

머무르지 않는 시간으로부터 짓이겨진

오늘의 이명과 내일의 비문증을

누군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더는 돌아갈 곳이 없는 잠이라고

인간의 허물을 비로소 벗는 중일 거라고

바람에도 닿지 않는 영혼이라고

 

그것들 벼랑을 견디며 절박해지기 전에

몸이 가늘어지고 부서져 색이 빠지고

뼈보다 먼저 바람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여기, 주인 없는 표정으로

납작 엎드려 그대로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깨어있는 체위로

 

다정해지는 저 흰 머리카락들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스스로

바람을 타기 시작한다

 

겨우 하나 남은 날개를 다 쓴 것처럼

배후가 아득해진다

 

 

시간의 초상

산책 1821~1867

    

이것은 한 영토의 죽음과 꽃에 대한 사랑이다

실어증에 눈길을 돌리라는 말은 아니다

당신은 평범한 몸과 그림자의 길로 가는

상징에 대해 잊어버린다

호기심 많은 바깥 세계의 꿈과 여행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너는 꽃을 만족시키려 쾌락을 꿈꾼다

아주 희미한 존재로 또는 가혹한 눈빛으로

증오의 지도를 만들고 있다

19세기의 창문과 마른 장미꽃과 뱀

보들레르의 혀로 너무 짧은 꽃을 얘기하는 것은

고양이뿐이다

발톱을 숨기고 몽상에 오랫동안 잠긴다

고양이 눈빛에 겁에 질린 당신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았다가

다시 중심을 잃고 욕망을 놓친다

그날의 몸놀림만은 상징보다 남루하다

체위에 들어가 아예 상처를 잊어버리려는 듯

당신은 무거운 네모 상자 속 환상도 아닌

가볍게 침대를 품는 것이다

반지 모양의 달과 동전 모양의 눈물이 뒤섞인 밤

추락할 것 같다

당신의 산책은 캄캄한 어둠 안에서 꽃이다

불안한 눈빛들이 쳐다보는 것을

꽃은 기억하지 못한다

단맛의 너머를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게 무언가를 체험한다

끝없이 애증의 손을 내밀 듯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당신은 입술을 벌리다가 안개처럼 두꺼워진다

모든 그림자를 풀고 스스로 어둠 속을 파고드는

새벽달이 며칠째 묘비 주위를 돌고 있다

 

 

 검은  

-울음

      

오디 열매가 까맣게 여름을 품고 있다

검은 울음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열매를 꽃이라, 아니 끝이라 말해도 될까?

나뭇가지 사이 검은 동공을 열어놓고

침묵으로 가득해지는 눈빛을 본다

 

나는 죽음의 배후를 본 적이 있다

계단을 슬그머니 걸어 나와 밤길을 걷는다

길 끝에는 검은 숲으로 들어가는

검은 입구가 있다

어떤 계절이어도 그것은 야만성

검은 호흡을 자랑삼아 견디는 중이다

 

나무가 뱉어놓은 그림자를 바라본다

우물처럼 덤은 얼굴이 겹쳐질 때마다

말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온다

바닥을 검게 바닥내고도

검게 흔들리는 것

캄캄함에 알갱이들이 먼저 떨어지고

바닥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눈빛들

 

뽕나무 아래 검은 장력의 버팀이 있다

당신은 비스듬히 누운 채 부스러지고

나는 그곳에서 검은 이불을 이마까지 덮는다

한순간 명료한 반짝임

나는 몸을 낮추고 검은 울음을 찾는다

 

    

사바나의 뿔

 

 

뿔에는 초식의 피가 돈다

머리 위에서 광휘를 키우며 뼈가 부풀어 오를 때

뿔의 조상은 나무라 부른다

 

숲의 바람을 가르며

혈기 왕성한 내력으로만 뻗어가는

초식의 자세는 숭배자와 같다

 

뿔을 흔드는 저녁

분노의 머리채를 대적할 수 있지만

바오바브나무처럼 뿔로는 소용이 없다

 

가지를 뻗어 포효를 드러내고도

닿을 수 없는 두개골 위에서

빛나는 종족의 혈통을 감당하느라

상처를 키우고 눈이 뒤집힌다

 

우듬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돌기를 세우듯 몇 생의 피를 돌아 나오는

뿔의 방향은 믿음직스럽다

 

순한 부족의 피를 기억하는 뿔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 새들이 모여든다

새들에게 신성한 뿔을 바치고 귀를 세운다

 

사바나의 몸 밖으로 드러낸 적의

쳔형을 견디는 정수리일 뿐

목이 꺾인 채 뿌리를 드러낸 달을 본다

 

 

-4(추천글)

      

한성희 시인의 이번 시집은 에 대한 내밀하고 섬세한 탐색의 과정을 보여 준다. 화자의 시선이 신문지나 벽, 계단, 비 등의 사물을 향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대상에서 를 발견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대상을 탐색한다. 그의 시에서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며 몸 밖은 몸 안이고 몸 안은 몸 밖이 된다. 외부의 물고기가 화자의 내면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로 변형되는 상상력을 보여 주는 물고기 편지는 특히 흥미롭다. 화자는 물고기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가 느리게 헤엄치다가 뼈와 살이 물에 녹아 문장이 사라질 때까지 물결로 남는다”. 내면에서 헤엄치는 느낌의 존재 생명의 존재에게, 아가미나 지느러미와 같은 리듬으로, 물결과 같은 문장으로 헤엄치듯 쓰는 시를 읽는 일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김기택(시인) 



 


 

 

한성희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09년 시 전문지 계간시평등단

2015년 시집 푸른숲우체국장현대시학

2020년 시집 나는 당신 몸에 숨는다천년의 시작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16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푸른숲우체국장.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