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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호 Vol.33 - 송재학


송재학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밤이 시작되는 이유

 

 

 속삭이는 저녁이 필요했다 입술의 습관으로 나에게 닿는 저녁의 온기는 먼 곳에서 왔다는 것, 공기 중의 얼룩조차 손발을 가진다는 슬픔, 비어 있는 의자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앉아서 처연한 흰색이다 같은 종류의 눈물이 모였으니까 내가 만든 어스름은 천천히 빗방울을 머금었다 비 오는 저녁은 입구가 많아져서 애상이 부풀었다 이름부터 젖어가는 저녁, 말하지 못한 이야기는 수줍음에 대한 것이다 그늘의 잎새는 저녁을 감싸다가 빗소리마다 귀를 달았다 어두워지지 않으면 못 견딘다는 심정이 이곳을 멈추고 밤을 불러온다 몇 십 년의 강우량을 머금은 밤비가 시작되었다

 



 불이 켜지는 순간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

 먼 곳은 사라지고

 별의 숫자가 지척이다

 슬픔과 기쁨이 서로 응시한다는 불빛

 이곳을 지켜보는 눈동자와 비슷해진다는 불빛


 

 

 

 


 ㅣ근작시 3편ㅣ

  

 해변 b



 직선 대신 점과 점이라는 항로는 새에 대한 의문의 형식이다 세계라는 말을 생략한 직각을 찾아가는 새 떼에게 표정이 있다면 비행의 높이라는 건 짐작이지만, 부글거리고 있을 해변 b의 이정표는 정지화면을 되풀이한다 낯설어하는 해안선의 커브 길은 대체로 역광의 목소리, 밝음과 어둠을 번갈아 사용하는 날갯짓, 어디를 날아가도 빛의 산란 속으로 잠기는 새 떼이다 늘어나는 사구와 더불어 먼 곳까지 연속사방무늬로 이어진 해변은 반복해서 읽고 있는 단편소설*의 페이지처럼 모두와 비대칭이다 말하지 않아도 될 새들의 주검은 차라리 투명하다고 믿을 수밖에, 홀로 파도에 젖어가는 리아스식 해변 b는 앞으로도 지도에 없는 곳이다 떠내려온 섬을 한사코 붙잡아야 했던 해변 b의 성정은 점차 사납고 고독해졌다 다시 도착하는 새들에 의해 어떤 해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로맹 가리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차용.



 


 입의 증식



 난 입이 작아서 언제나 다른 입이 궁금함, 저작근이 파열될 때까지 한껏 입을 벌리는 종족은 외로운 그림자를 이끌고 홀로 살며 공복을 두려워함, 윗턱과 아래턱 사이의 둔각을 만드는 생물학은 낯설지만 어두운 근대에 서식하는 파충류의 기이한 몽타주만큼은 짐작해, 아귀를 위하여 입과 입이 외로운 관절 기계처럼 간헐적 소리를 낸다는 건 입의 증식이랄 수밖에, 뭐든 한 입에 삼켜야 하는 구렁이의 한 끼처럼, 삼켜서는 안 되는 것을 삼켰기에 평생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혐오처럼, 살아 펄떡거리는 것이 목구멍에 걸린 바로 그 순간, 후회로 자기 입을 기워서 잎과 목이 딱딱해졌다는 나무의 산옹이 죽은옹이 옹이구멍 썩은옹이와 다르지 않을 나의 입과 입술 근처

 



 

 빗살무늬



 어떤 무늬가 너의 몸에 기워진 건 알고 있니, 물고기 뼈처럼 생긴 무늬는 희고 촘촘하면서 지워지지 않을게 분명해, 거치무늬, 격자무늬, 결뉴무늬, 궐수무늬, 귀면무늬, 기봉무늬, 길상무늬, 능삼무늬, 무늬의 이름을 말해보다가 마지막에 만난 빗살무늬, 무늬를 처음 그려본 사람은 어떤 슬픔에 누웠을까, 눈물이 흘러 앞섶을 적신다면 이런 무늬는 오래 기억할 수 있어, 그게 가엽지만 나쁘지만 않아, 주검을 포함해서 희로애락을 덮을 수 있는 호의는 지상에 가득 널렸어 



 




 ㅣ시인의 말ㅣ

  

 내 몸이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때 몸은 예민한 감각기관이다. 따라서 민감한 몸은 생로병사를 먼저 알게 된다. 그 메커니즘은 언제나 선연하다. 수용하기 힘든 감정을 분홍 피처럼 몸에 새긴다. 운명을 차츰 받아들인 것처럼. 잘 받아들이거나 억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간을 몸에 새긴다. 예컨대 어떤 감정은 결코 몸이 잊지 못하게 만든다. 너 잘 견디고 있어,라고 위로를 건네지만 커다란 감정은 슬픔에서 위로까지 모두 삼킬 뿐이다.

 

 

 

 

 

 

 
 

 송재학 시인

 1986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얼굴』『내간체를 얻다』『날짜들』『검은색』『슬프다 풀 끗혜 이슬』『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