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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 Vol.32 - 조정인


조정인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이렇게 고요하고 차가운 불꽃의 세계

 

 

 왜냐하면 꽃들의 체온은 대체로 4'C이니까


 집에 와 곰곰 생각하다가 


 저녁 먹고 이 닦고 다시 생각하니


 꽃들은 이미 구백 살은 족히  된 채, 갓 깨어난 

 잠의 음악이거나 


 구백 살인 채 태어난 어린 신들인 거라


 신이기에 물론, 슬픔 따위 몰라야 하는


 이 깊은 슬픔

 



 

 

 

스승님, 거세게 흔들리는 저 나무는 나뭇잎이 움직인 겁니까, 바람이 움직인 겁니까?

 나뭇잎도 바람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네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육조 혜능의 풍번風幡.

 

 

빈 베개를 베고 사념들이 누웠다 가고는 했다.


 *


 깊은 가을밤, 소년을 갓 벗은 젊은 스님은

 베개를 나눠 벤 묘령의 향긋한 체취를 가진

 희고 따스하고 보드라운 사념을 더듬다가 

 잠에서 깼다.


 흰 달빛 아래 검은 나뭇잎 그림자가 스산하게 흔들리는 

 절 마당


 마당을 서성이던 스님은 

 사념의 맑은 콧날이 남은 손끝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수면으로 뛰어든 눈송이 같은 가뭇없는 흔적이었다.


 스승이 다가와 물었다.


  왜 우느냐,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슬픈 꿈이라도 꾸었느냐. /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느냐. /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그렇습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 도입부에서. 

 

 

 


 ㅣ근작시 3편ㅣ

  

 세 번째 거짓말에서 만난 싯다르타



 하나의 사안에 대한 거짓말이 두 사람을 건너가는 동안, 디테일이 생기고 

 그럴듯한 서술이 붙었다. 세 사람을 건너가면 서사가 생길 테지만 싫증이 나서 

 입을 다물 것이다. 어제오늘에 걸쳐 다듬어진 거짓말의 세공에 대해 그건, 

 일종의 창작물이라고 사뭇 즐기는 기분이 드는 나른한 오후


 자위 또한 속임수요 용기 없음의 반증일 뿐이오


 세 번째 거짓말에서 싯다르타를 만난 것이다


 강물을 따라 걷던 싯다르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월 물빛 같은 얼굴을 들어 나를 건너다본다


 싯다르타,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발생하는 리듬. 

 내 안의 강물을 따라 걷는 사람.


 강물은 시간을 실어 나르고


 싯다르타, 싯다르타, 싯다르타…… 읊조리면 

 구름처럼 생기生氣하는 이상한 아름다움


 싯다르타,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조용한 감염. 서쪽에서 불어오는 함박눈, 함박눈, 함박눈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연녹색 이상한 노래 





 불어나는 풀



 풀, 부르면 풀은 자꾸 불어나 풀밭이 되고 당신, 부르면 당신은 물처럼 불어나 너울거렸습니다. 낮게 휘파람을 불며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섶입니다. 


 새벽 풀밭을 가로지릅니다. 꿈속, 어딘가를 더듬어 가듯 풀의 깊이에 발목을 빠트리며 갑니다. 발바닥 아래 어둠이 일어섭니다. 신탁이 별똥별처럼 떨어진 장소를 찾아가듯 갑니다. 조금 후의 내가 조금 전의 나를 용서하며 갑니다. 당신에게 가는 동안 나는 아름답습니다.

 

 식물의 무의식이 물처럼 땅을 덮으며 어슬렁어슬렁 앞질러 갑니다. 소란스럽고 넘치고 꿈틀대고 뒤채며 앞질러 갑니다. 당신이 범람합니다.

 

 풀, 하고 부르면 오래전에 사라진 그곳이 거기, 본래 있었다는 듯 태연합니다. 구성하지 않는 구성, 음악 아닌 음악으로 자꾸만 차올라 풀밭으로 있습니다. 큰물을 밀고 나가듯 나는 당신을 밀고 갑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눈 내리는 행성을 나는 가졌네



 흰 보자기에 싼 나무상자를 장롱에서 꺼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방입니다.

 

 꽃비린내 물큰한 봄날입니다. 오늘은

 생전에 우리 모녀 못다 한 꽃구경 가요.


 어느 이팝나무 아래가 좋을까, 도시락도 펴야지요.

 꽃그늘 넉넉한 이팝나무를 찾아 기웃거렸습니다.


 사는 일이 악몽도 길몽도 아닌, 꿈속을 더듬는 일이라 

 고독은 무서워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하셨습니까.

 네 웃음소린 왜 그리 쓸쓸하냐  

 웃는 듯 우는 것처럼만 들린다, 하셨습니까.


 나, 세상에 오던 해는 눈이 많아 삼월에도 

 눈이 잦았다지요.


 ―이슬이 비치고 산통이 오고, 그날은 새벽부터 눈발이 날렸어. 애 받으러 온 이 가고 핏덩이 옆에 가물가물 눈을 붙였는데, 꿈에 너 가진 지 넉 달 되고 죽은 네 애비가 와서 요 밑에 손을 밀어 넣더구나. 장작 많이 해놨으니 원 없이 때게, 하며 방문을 활짝 열어 보이는데…… 대흥여관 문간방 앞 벽에 빼곡히 들어찬 누런 장작더미가 그리 환하더구나.


 꿈속을 더듬는 당신 눈 속에 희미한 웃음이 지나갔던가요.

 이후, 사계절을 당신 방엔 내내 눈보라가 들이쳤겠습니다.


 꽃그늘 짙게 밴 봄흙은 참 보드라워서 그곳에 

 당신 눈보라 행성을 묻을까도 생각하다가


 날은 저물고 꽃그늘을 만지던 손이 다 젖어 


 당신 마지막 방을 꼭 끌어안고 백 년 눈밭을 걸으며 

 품속 당신께 가만히 물었습니다.

 어머니, 오늘 꽃구경은 좋으셨는지요? 






 ㅣ시인의 말ㅣ

  

 질문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간혹. 당신에게서 싯다르타를 읽는다.

 싯다르타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질문의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肖像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조금이나마 아름다움에 물들고 싶기 때문이다. 

 이 말은 추상적인 말이지만 이 말은 또한 우리들 내면에 분명 자리해 있는  갈망과 희구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는 분명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 작동한다.  

 아름다움에 물들고 싶은 욕망이 우리들로 하여 사랑하게 하고 쓰게 한다.

 

 

 

 

 

 

 
 

 조정인 시인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장미의 내용』『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 『웨하스를 먹는 시간』『새가 되고 싶은 양파』

 지리산문학상, 문학동네 동시문학대상, 구지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