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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호 Vol.31 - 안도현


안도현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너에게로 망명을 가고 싶은 날

 

 

 들뜨게 하는 것을 찐빵이라고 하자

 떨어지지 않는 것을 감태나무라고 하고

 녹지 않는 것을 치욕이라고 하자


 불꽃이 튀는 철공소 앞을 지나갈 때

 서로가 서로를 잇는 일이라면

 강철과 강철을 이으려고 용접하는 일을

 강철이 강철에게 망명하는 일이라고 하자


 앞산에 진달래가 문드러질 때

 앞산 진달래가 뒷산 진달래에게 건너가고 싶은 

 그 순간을 정치라고 하자


 찔레꽃을 손목시계라 하자

 흰목물떼새를 멸종이라고 하자

 소나기를 흔들어 깨워 너에게 가고 싶을 때


 바퀴 자국 하나 찍지 않고 파도가 세계를 건너올 때

 화물트럭이라고 하자

 자신을 해안에 결박한 포구를

 트럭 운전사라고 하자


 탱탱해졌다고 우는 탱자를 섬광이라고 하자

 까매졌다고 깍깍대는 까마귀를 봄날이라고 하자


 미쳐 날뛰는 것을 침묵이라고 하자

 가 보지 못한 것을 여행이라고 하고

 깨뜨리지 못한 것을 연애라고 하자

 



밤눈

 

 

 저수지가 넓어서 가창오리떼가 도래한 게 아니다 그들이 부리로 저수지의 끝자락을 물고 한꺼번에 날아오른 다음 순식간에 수면을 엎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평의 저수지를 세워 벼랑으로 만들거나 벼랑을 허물어뜨려 파지로 만드는 일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다 가창오리떼는 수면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긁고 헤집어 흉을 낸 다음 그 흉에 딱지가 앉을 때를 또 기다리는데 그때가 절기로는 대설이다 반쯤은 몸이 물속에 잠겨 있고 반쯤은 물 위에 뜬 상태로 살아가니 모두 반지하 방 세입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겨울은 길고 가창오리떼는 단순하지 않다 때로 날개 끝에 달린 전등 스위치를 내리고 어둠 속에서 가차 없이 텅 빈 뼈를 잘게 쪼개고 부수어 구만리 장천에 뿌리는 날도 있다 헛되어서 실한 날이다 쾌히 밤눈이 내리는 날이다

 

 

 


 ㅣ근작시 3편ㅣ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생각하느라 

 가을을 다 보냈다 

 꽃밭의 위상을 높이는 일은 아니었고 

 꽃들의 구두 뒤축을 받치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은 마사토 한 트럭을 주문했고 

 세렉스 1톤 덤프트럭이 부어 놓은 흙을 삽으로 떠 꽃밭에 

 넣었다 마른 꽃무릇은 숨고 구절초 꽃대는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꽃밭이 두툼해지면 

 발목이 빠진 작약은 키가 낮아질 것이었다

 노루귀 옮겨 심은 자리에 흙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가슴을 졸이는 일이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꽃밭에 들어가 돌을 골라내고 있는데 동무가 왔다

 꽃밭을 높여보려고 한다니까 

 시인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는 일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꽃들의 키를 높이는 일, 그거  

 쓸데없는 일이지, 혼자 중얼거렸다

 서리 오기 전에 배추나 서둘러 뽑으라 하였다 


 나는 다음에 톱밥이나 한 포대 사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톱밥은 뭐에다 쓸라꼬? 

 닭똥 치우고 나서 거기 깔아주려고 하네 

 그러자 이제는 병아리 키 높이는 일을 하려고 하는구먼, 하고 웃었다 

 나는 동무에게 자네도 시인 다 되었네, 하였다





 물음과 무덤



 경북도립안동의료원 영안실에서 엄마를 꺼냈죠

 남편 없다고 엄마가

 더 이상 울지 않았어요

 할머니 묻으러 간다고 어린것들이 더 크게 울었어요


 엄마는 버스 화물칸에 누워 무얼 생각할까요

 어느 겨울 대파 뿌리를 화분에 묻으며 

 느 아부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자 하더니만, 하던 말

 그러다가, 청춘 홍안을 네 자랑 말어라 

 덧없는 세월에 백발이 되누나, 한 곡 뽑고는

 나는 가슴 밑바닥에 다 묻었다, 했지요


 엄마, 사실은 가슴이 아니라 허공에 묻은 거지?

 보이지 않으니까 묻었다고 말한 거지?

 묻으면 보이지 않으니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거니까


 평생 밥을 먹었느냐고 물었죠, 엄마는

 어느새 맨살을 잘라 쌀을 안치고

 내장을 꺼내 동태탕을 끓이고

 요새 밥 못 먹고 사는 사람 어디 있냐고, 버럭

 노한 척하면서 나는 숟가락을 들었죠

 동그란 양은 밥상 앞에서 어두운 무덤처럼


 이건 엄마가 모르는 건데

 집을 짓고 통창을 달았더니 물총새가 부딪쳐 죽었어

 나는 물총새를 감추려고 땅에 묻었지

 봄날 얼음이 녹자 물 위에 뜬 잉어 세 마리도 묻었고

 폭우 거칠던 날 죽은 고라니 새끼도 묻었고

 서서 죽은 마당의 주목 나무 두 그루는 불에 태웠어


 편지를 묻어본 사람은 삶의 슬픈 격류에 떠밀려 본 사람, 

 스무 살 때 내 정강이뼈를 으스러지도록 차던 그 계엄군 병사는

 나처럼 수염을 깎으며 늙어가고 있겠지요

 김지하 시집 『황토』 초판본을 감출 데가 없어

 땅에 묻어야 할까 괴로워한 적도 있었어요


 학교는 묻지 말고 묻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물으면 물음이 되고

 묻으면 무덤이 된다고 말한 건 국가였어요

 과거를 묻으면서 어른이 되지요


 우리는 엄마를 묻었다는 걸 감추려고 해마다 벌초에 나서겠지요


 엄마가 간신히 불구덩이를 벗어나

 최첨단 화장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처음이지, 엄마?

 시원하시겠네, 정말

 




 북천



 경남 하동에도 있는 북천 경북 상주에도 있는 북천 강원도 고성에도 있는 북천

 지명에도 있고 하천명에도 있고 간이역 이름에도 이대흠의 시에도 스님 법명에도 있는 북천


 북천의 뒷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살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출시되고 아이스크림 장사보다 참나무 장작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은 북천 청둥오리 떼를 잡아 연탄불 위에 굽는 저녁이 왁자할 것 같고 큰 강의 얼음장은 국어대사전보다 두꺼울 것 같고 이런 추측은 북천이니까 가능할 것 같고


 꽁꽁 얼어붙은 북천에는 투기꾼들이 묵을 여관이 없고 고층아파트를 짓지 않으니 은행에 대출하러 갈 일이 없고 은행원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고 연대보증 부탁하는 시간에 처마 끝 고드름을 따먹을 수 있어 좋고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동요를 부를 수 있어 좋고 북천의 언덕에서는 마을의 지붕이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처럼 다 보이고


 북천 주변의 산골짜기에는 자작나무가 살고 산꼭대기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고갯마루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경사지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산속의 화전민도 자작나무를 때고 산속의 사찰에서도 자작나무를 때고 일 년에 딱 한 번 초파일에 절에 가는 여자가 사는 집에서도 자작나무를 땐다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북천에 노천탕이 있나 생각할 것이고 삼복염천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은 북천의 마굿간에도 에어컨이 들어오나 걱정할 것이고 천상병의 시를 읽어본 사람은 북천이 소풍 가는 곳인 줄 착각할 것이고 부천에 사는 사람은 부천에 왜 기역자가 하나 더 붙었지 하며 의아해할 것이고 


 나는 북천에서 태어나 보지 못한 사람 북천에 나가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럼에도 친절해져서 북천의 스피커처럼 말한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





 ㅣ시인의 말ㅣ

  

 배추의 시간


 

 텃밭에 100포기 정도 배추를 심었다. 9월 초에는 모종을 심어야 하는데 때를 놓쳐 보름이나 늦었다. 배추를 심는 일보다 심기 전에 흙을 고르고 두둑을 만드는 일이 농사의 절반이다. 트랙터나 경운기의 힘을 빌릴 일도 없으니 일일이 삽과 괭이를 들고 나서야 한다. 소규모 텃밭을 가꾸면서 감히 일본의 야마오 산세이의 산문집 『어제를 향해 걷다』(상추쌈)의 한 문장을 떠올린다. “우리는 실은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어제를 향해서 걸을 수 있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 밭을 일구던 사람들처럼 텃밭 가의 거름더미에서 거름을 퍼 나르고 오줌통에 받아둔 소변을 물에 희석해서 뿌렸다. 올봄에 쓰다 남은 복합형 비료도 몇 주먹 던졌다. 그렇게 나름대로 공을 들였지만 아무래도 두둑이 부실하다. 두둑의 너비가 좁고 높이도 낮아 보인다. 배추들이 펑퍼짐하게 눌러앉지 못하고 외줄 타기를 하게 생겼다. 내 빈약하고 게으른 삽질이 만든 결과다.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모종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된서리가 오기 전에 과연 몇 포기라도 건질 수 있을까? 하루에 두어 번 텃밭에 물을 뿌려주는 일이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사나흘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한 뼘쯤 자라다가 그만 목이 말라 숨을 놓아버린 모종도 있다. 그럴 때면 배추들에게 ‘억수로’ 미안해진다.

 모종을 심은 지 열흘쯤 지나 고심 끝에 읍내 농약 점포에 가서 나방애벌레를 잡는 약을 사서 분무기로 뿌렸다. 작년에는 약을 치지 않은 탓에 배춧잎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절반도 채 수확하지 못했다. 어린 배춧잎을 갉아먹는 섬서구메뚜기라는 놈들도 보이는 족족 나에게 화를 입어야 한다. 이놈들은 몸이 3센티미터쯤의 크기인데 더 작은 수놈이 훨씬 큰 암놈을 올라타고 앉아 짝짓기할 때 내게 들키기 일쑤다.

길을 지나다가 남의 배추밭을 보면 벌써 속이 들어찬 배추들의 위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눈부실 정도로 당차다. 새끼손가락만 한 모종들이 한 달 사이 제대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왕성하게 잎을 옆으로 펼치고 있는 이 장관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 배추에게도 고심이 있었을 것이다. 오소소 살갗에 소름이 돋는 밤과 목이 말라 하늘을 쳐다보던 오후도 있었을 것이다.

 10월 중순이 되자 우리 텃밭의 배추에도 속이 들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영 시원찮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속이 꽉 차려면 한 달 이상 배추의 시간 주위를 기웃거려야 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처럼 ‘배추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여전히 어설픈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들떠서 속이 찬 배추 밑동을 자르는 날을 기다린다. 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나면 한없이 하얗고 푸르고 넓고 깊은 배추 밑동만 남는다. 배추 뿌리의 마음이 배추 전체로 올라가는 바로 그 통로 말이다. 그 서늘한 자리는 마치 작은 손바닥만 한 하얀 종지처럼 보일 것이다. 

배추를 수확했다고 해서 배추의 시간이 끝나는 건 아니다. 김장하는 날은 배추의 ‘속구배기’처럼 노랗고 왁자지껄한 말들이 마당에 퍼질 것이며,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김장독 속에서 배추는 발효의 시간을 이어갈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 제대로 익은 사람이 되나?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북항』『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등을 냈다.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